2019년은 전 민족이 봉기한 항일독립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며 오늘날 우리가 민족의 자부심을 안고 살아가는 현실적 토대를 마련해준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의 흔적은 경남 함양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함양 백용성선사 화과원 유허지 (咸陽 白龍城禪師 華果院 遺墟址)’다. 진종 백용성(白龍城)대종사는 구한말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때 만해 한용운과 함께 불교측 대표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며 그가 1927년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 8부 능선의 황무지와 임야를 개간하여 과수원을 조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위해 세운 국내 유일의 선승농장이 화과원이다. 함양의 역사를 넘어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소중한 사료로 보존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이유다. 본지는 ‘독립·개혁의 상징 함양 화과원의 재발견’ 기획 취재를 통해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지원과 참선하며 일하는 선농일치의 불교운동 진원지였던 화과원의 현재 모습과 위상을 고찰하고 미래의 위상을 정립해 국가사적지 지정을 위한 점검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아울러 화과원의 재발견을 통해 경남 함양이 독립운동의 산실이요 충절의 고장임을 밝혀 군민의 자긍심 고취와 우리 고장 함양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드높이고자 한다. / 편집자 <글 싣는 순서>1. 민족독립과 불교개혁의 진원지2. 민족과 전통불교를 지킨 백용성 3. 화과원의 중심 대각사상4. 만주 길림에서 함양 백전까지5. 함양 화과원의 2027년 3.1운동과 항일운동의 숨은 주역 민족과 전통불교를 지킨 백용성“다들 백용성 스님은 민족대표 33인 중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불교 대표로 참여한 스님으로만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백용성 스님은 ‘대한민국 수립’의 최초 발원자이며, 손병희 천도교 교주와 3.1운동을 계획했습니다. 또한 독립자금을 꾸준히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던 지원자였습니다.”독립운동가이자 근대불교 선지식인 백용성 스님(1864~1940)이 3.1운동을 계획하고 ‘대한민국 수립’을 처음으로 발원했다는 구술 증언이 화제가 되고 있다.지난 2월27일 서울시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이사장 법륜스님)가 주관한 ‘독립운동가 백용성: 잊혀진 백년의 진실’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맡은 법륜(法輪)스님(정토회 지도법사)은 용성 스님의 행적과 역할을 통해 재조명하며 이같이 주장했다.법륜 스님은 발제를 통해 이미 1906년에 용성스님이 ‘대한민국’을 언급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는 “백용성스님은 ‘대한민국 수립’의 최초 발원자로, 손병희 천도교 교주와 3.1운동을 계획했다”며 “또한 독립자금을 꾸준히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던 지원자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용성스님이 3.1운동과 항일운동의 숨은 주역이었다는 것이 법륜 스님의 설명이다.또한 법륜스님은 용성스님의 항일 운동으로 △3.1 운동 계획과 종교간 통합 △대한민국 수립 발원과 태극기 사용 △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 자금 지원 △윤봉길 대한민국임정 파견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인 용정 대각교당 농장 선농당 설립 △조·중 연합국 창설 구상(1만 의병 참여, 총사령관 홍범도) △항일 불교운동 등 7가지를 꼽았다.이 같은 백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의지는 대한제국의 부흥이 아닌 대한민국의 수립이 있었다는 게 법륜 스님의 주장이다.진종 용성 스님의 생애와 발자취백용성의 생애는 한용운이 지은 《용성대선사 사리탑비명병서》와 용성 스님 어록인 《평상심이 도라 이르지 말라》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용성스님은 1864년 5월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스님의 본관은 수원(水原), 속명(俗名)은 상규(相奎), 법명(法名)은 진종(震鍾), 법호(法號)는 용성(龍城)이다. 어머니가 한 기이한 스님이 법의를 입고 방에 들어오는 것을 꿈을 꾸고 그로부터 임신하여 용성을 낳았다고 한다.9세에 서당에 입학하여 한학을 배웠다. 14세 때 남원군 덕밀암에서 출가하였으나 부모의 강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가 16세(비명에는 19세) 때 해인사 극락암에서 화월 화상을 은사로 혜조 율사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출가했다. 21세 때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선곡율사에게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출가 이후의 삶은 크게 수행의 시기와 대중포교의 시기,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아가 혜월, 만공 등 선지식과의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을 재확인하고 상비로암, 보개산 성주암, 덕유산 호국사 등에서 선회를 개설하는 등 선수행 전통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다.1911년 48세 되던 해 용성은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 봉익동에 대각사를 건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불교 포교와 참선 대중화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용성의 이러한 노력으로 비로소 서울에 ‘참선’이라는 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53세부터 55세의 3년 동안 북청에 금광을 경영하여 불교사원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다.56세 되던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대표로 활약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58세(1921)에 출옥 후 삼장역회를 조직하여 한문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다 많은 대중이 쉽게 불교경전을 접하도록 함으로써 포교에 힘썼다.59세(1922) 때에는 만주 연길, 명월촌, 영봉촌에 70정보의 대지를 확보하고 대각교당을 건립하여 교당을 중심으로 한 생산소비 조합운동을 전개했다. 61세(1924) 때에는 박한영과 함께 《불일》지를 창간하였고, 62세(1925)에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를 조직하여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 실천에 힘썼다. 특히 결사의 참석자를 청정비구에 한정하여 수행자에게 엄격한 계율 준수를 요구했다.63세(1926)에는 총독부에 1차와 2차에 걸쳐 건백서를 제출하여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하는 것이 승려의 본분임을 밝혔다. 64세(1927)에는 경남 함양군 백운산에 화과원을 건립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 승려 또한 노동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의 선농일치불교를 실천했다. 71세(1934)에 일제의 압력으로 대각교 재산을 신탁하였고, 73세(1936)에는 강제적으로 대각사를 대본산 범어사 경성포교당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1938년 대각사는 결국 창설 18년 만에 일제의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용성 사후 1953년 신탁한 재산을 20년 만에 문도들이 인수하여 대각교회로 대각사를 부흥했다. 그리고 1969년 대각사는 재단법인 대각회로 문화공보부에 등록·인가되어 현재에 이르며, 용성의 유지를 이어받아 포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백용성은 77세(1940)에 입적하니 법랍은 61세였다.대각사와 화과원, 불교 혁신의 아이콘1911년 4월 용성스님은 서울 종로구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창해 본격적으로 대각교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스님이 평생의 업(業)으로 생각한 대각교운동이란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는 것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삶의 문제와 괴리된 채 산중(山中)불교화되고, 또 개항 이후 일본 불교의 침투로 말미암아 왜색화(倭色化)되고 있던 기존 불교를 개혁해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각교운동의 본산인 대각사는 대중불교, 호국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포교소이자 수행장이었고 한용운 등 많은 불교계 민족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해 용성스님과 상의·논의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또한 함양 화과원도 용성 선사에게는 새로운 실험장이었다. 백용성은 화과원을 만들고, 운영하고, 수행하면서 자신의 사상(혁신불교, 민족운동 등)을 구현하였다. 그의 후반기 삶의 구현처이었던 화과원은 백용성의 생애와 사상의 탐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상이다. 또한 화과원은 인문학의 터전이었다. 용성 스님은 화과원에서 역경, 저술, 집필을 하였다. 아울러 그에게 화과원은 민족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대각교와 화과원의 설립 자체가 항일 불교운동의 산물이었다./박민국·정세윤 기자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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