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도(道). 가진 이든, 그렇지 못한 이든 다 친구다. 혼자 놀아도 재미있고 같이 놀아도 재미난다. 음악까지 있으면 더 재미지다.” 함양군 마천면 군자길 1번지 백무동 가는 길 초입 ‘길카페’는 1년 열두달 문을 닫는 법이 없다. 주인이 있든 없든, 손님이 오든 말든 항상 문은 열려 있다. 2012년 4월 문을 연이래 단 하루도 문을 닫은 일이 없다는 장건호(60) 씨가 이 카페 주인장이다. “길카페 대표(사장)라고 불러야하냐”고 묻자 “대표는 무슨”이라며 “직원이 따로 없으니 내가 바리스타도 되고, 머슴도 되고, 음악도 틀어주고, 악기도 연주하고 손님들과 같이 노는 게 일이다”고 선문답을 한다. 남색 개량한복과 보라색 등산용 벙거지 모자가 길지 않은 흰수염에 푸근한 그의 인상과 묘하게 어울린다. “지리산 밑에 살지만 나는 자연인은 아니다”며 “늘 재미있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자유인이다”고 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는 사업실패로 건강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서야 비로소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 10년 전 가까운 지인의 배신으로 사업을 실패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다. 배회하듯 전국의 산을 올랐다. 우연찮게 지리산 뱀사골 움막 같은 외딴집에서 혼자 생활하게 됐다. 화병과 폭음으로 인해 위장에서 췌장까지 몸 속 장기라는 장기는 성한 데가 없었다. “그동안 인스턴트식품에 의존해 살다가 깊은 산속 외딴집에 살다보니 먹을 것이 많지 않아 자연히 소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반찬은 청국장과 된장, 동치미가 전부였다. 8개월을 그렇게 살다보니 몸의 병은 거짓말 같이 나았다”고 한다. 장 씨는 이때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깊은 산속 생활이라 차(車)와 휴대폰이 필요 없었다. 이 두 가지를 버렸더니 건강을 되찾았다”고 했다. 슬로푸드를 하고 천천히 살다보니 여유도 생겼다. 화병도 자연히 사라졌다. “치열하게 사회생활을 할 때는 내가 아닌 남들만 보고 살았다. 그 속에 나는 없었다.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 곳에서 혼자 살다보니 처음으로 남이 아닌 나를 보게 됐다”면서 “나의 편안한 모습을 보면서 부드러워 지고 음악까지 있으면 더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건강을 회복한 장 씨는 고향인 거창과 가까운 지리산에서의 인생2막을 시작했다. 8개월간의 뱀사골 생활을 뒤로하고 이곳 마천으로 삶터를 옮겨 음악이 있는 길카페를 열었다. “노래 부르는 것은 좋아했지만 악기는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 내가하는 연주는 엉터리”라는 그는 “중학교 때 잠시 기타를 쳤을 뿐”이라고 한다. 소질을 타고난 탓인지 기타는 물론이고 드럼, 하모니카 등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데 실력도 예사롭지 않다. 색소폰을 배우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하모니카를 불게 됐단다. 독학 2년 만에 어떤 악기와도 합주가 가능한 연주자로 일취월장했다. 며칠 전에도 선상음악회 초대를 받아 군산을 다녀왔다. 그는 한달에 한번은 음악여행을 떠난다. “내 마음이 벅차게 좋으면 어떤 인연이 없어도 만사형통”이란다. “지리산 밑에 잘 노는 놈 하나 있다고 소문이 나, 같이 놀아달라고 전국에서 길카페를 찾아온다”고 한다. “이곳에 오면 모두가 친구가 된다”는 그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은 한마디도 안하고 한 시간이상 묵묵히 듣기만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자기편이라는 동질감을 갖는다”면서 “갈등은 서로의 주장을 앞세우는데서 온다”고 했다. “아, 이 사람 뭐지?”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뮤지션도, 가수도, 사업가도, 철학자도 아닌 그냥 잘 놀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정리한다. 대학시절 대학로에서 음악연출을 하기도 했다는 장건호 씨. 다양한 음악 동아리나 개인들이 참여하는 버스킹 문화를 활성화 시켜 함양의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싹틔우고 싶다는 게 그가 꿈꾸는 유일한 욕심(?)이다. 그 출발점이 될 오는 12월 초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