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면 상백마을(2019년 10월 현재)♧ 수동면 상백리 소재(세대 69가구)♧ 인구 116명(남 59, 여 57)♧ 주요농·특산물 : 양파, 벼, 보리 ♧ 이장 : 정의상 한때는 130 가구가 거주했던 안의현 백토면 소재지 상백(上栢)마을은 안의면과 수동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금호(중생원), 고실, 상백 세 개의 자연 부락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옛 명칭은 잣들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해 윗잣들(웃잣뜰)이라 불렸다. 안의면이 함양군과 함께 안의현으로 불리던 조선 말기에는 수동면의 상백·내백마을, 지곡면의 남효리 등이 백토면에 속했다. 당시 상백마을은 백토면사무소가 있던 면소재지로 면의 중심마을이었다고 한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백리라 고쳐 부르며 수동면에 편입됐다.1970년대에는 농지개량 사업으로 경지를 정리하다 삼국시대 말기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돌무덤에서 갑옷, 토기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부족시대에도 이미 사람이 살았던 오래된 마을로 추측되며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기도 하다. 이외수 작가의 고향이며, 쓰리스타(중장)로 해군사령관을 지낸 정태석 장군을 비롯해 유명인사들을 배출한 고장이기도하다. 또 며느리 까지 합치면 박사만 30명이 넘는다고 한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함양여씨가 터를 잡아 살면서다. 조선 세종때 신창표씨가 한양에서 이주해 왔고 선조 때 김녕김씨가 합천 삼가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기록돼 있다. 이 밖에도 동래정씨, 전주이씨, 고령박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고 전한다. 이외수 작가의 고향마을 추수철을 맞이한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정의상(사진·69) 이장이 마을 주민들을 회관으로 불러 모았다. 회관에는 이미 방 안 가득 어르신들이 모여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정의상 이장은 “우리 마을 주민들은 이 보다 더 많은데, 오늘 장에 나가고 일 때문에 못 나온 분들이 많다”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마을에 대한 애착심과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해 30대의 젊은 나이에 이장을 맡아 총 30년 동안 이장으로 마을일을 도맡다시피 하고 있다. 상백마을은 사람이 많을 때는 130세대가 살았다고 한다. 1반부터 8반까지 있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상백마을은 이외수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을 어르신들은 어렸을 때 본 이외수 작가의 모습을 기억했다. “이외수 작가는 내 친구에요. 어렸을 때 상내백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같이 무용도 하고 놀았었다”면서 “그가 어릴 적 할머니와 이 마을에서 살았었는데 어느 순간 전학을 갔다가 이렇게 유명인사가 됐다”고 했다. 이 작가는 자주 고향을 찾아 마을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눈다고 한다. 한 어르신은 “외수가 저 건너 율림으로 온다카더만 무슨 영문인지 요즘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잣나무가 “있었다” “없었다” 잣들이라 불리는 마을의 유래는 잣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상백마을이 고향이라는 두 할머니는 “새마을운동하기 전까지 잣나무가 도랑가에 쭉 있었다. 우리가 태어났었을 때는 없었다”며 의견이 갈렸다. 잣나무가 있었다고 한 할머니는 “정 면장님 집 앞에 도랑이 있었는데 그 곳에 잣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잣나무를 보지 못했다는 할머니는 “내가 더 오래 살았는데 잣나무는 마을에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직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잣나무는 현재 마을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마을 안에는 400년 이상 된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는 깊은 뿌리가 표면으로 보이는 독특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여름이 되면 여기서 주민들이 모여서 웃고 재잘거린다고 해 소남지(笑喃地)라고 불리는 곳이다. 소남지 앞에는 물이 흘러 돌다리를 건너 다녔는데 새마을운동 때 도랑을 복개해 넓은 길이 됐다. 돌다리 상판은 소남지 느티나무 아래서 지난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다. 어르신들이 어릴 적에는 이 나무에 그네를 메달아 놓고 놀던 놀이터였다. 소을 묶어두기도 했고 정월 대보름날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논농사의 시발 ‘김천백 개토비’상백마을은 수동면과 안의면 경계에 있어 예부터 가까운 안의면이 주 생활권 이었다. 수동면 소재지까지는 12km이지만 안의까지는 2k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행정구역이 수동면이어서 주민등록등본 한통을 떼려 해도 면 소재지까지 12km를 걸어 다녀야 했다”면서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마을 앞 큰 도로를 따라 걸어가면 안의 밤 숲이 강 건너로 보인다. 그 경계에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옛날 김천백 씨라는 농민은 이 하천에 돌을 쌓아 ‘보’를 설치하고 수로를 만들어 마을앞뜰로 농사에 필요한 물을 흐르게 했다. 밭농사를 주로 짓던 마을 사람들은 이 수로 개설로 인해 논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 상백마을 김용득(83) 노인회장은 이 유래가 담긴 ‘김천백 개토비’로 안내했다. 개토비는 김천백이라는 사람이 쌓았다는 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다. 원래 마을 인근 국도 3호선 길가에 있던 것을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김 회장은 “김천백이라는 분이 어느 날 꿈에서 보를 만들어 농사를 지으라는 선몽을 해 새벽에 강가로 나가보니 물길(수로)을 낼 자리에 서리가 선명하게 내려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 도랑을 만들고 강에 보를 설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은 김 씨에 대한 고마움을 비석으로 세우고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바로 옆으로는 국회의원 민병권, 함양군수 이성철 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가 나란히 있다. 돌로 쌓은 보를 시멘트로 만든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척척박사 이진수 씨 마을에는 박사로 통하는 이진수(사진·85)씨가 있다. 정의상 이장은 “마을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라 이 분이 꼭 있어야 한다”며 농사일로 바쁜 이진수 씨를 붙잡았다. 이 씨는 이외수 작가의 사촌이라고 한다. 또 그의 할아버지가 백토면장을 지낸 이덕선 면장이다. 나이를 먹어 잊어버린 기억이 많다고 하지만 명칭에 대한 한자의 뜻까지 세세히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큰 덕(德)에 착할 선(善)자의 뜻을 가진 이덕선은 백토면장으로 있을 당시 그가 받았던 녹봉(월급)을 모두 주민들에게 베풀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져 혜민원 주사로도 임명됐다. 이덕선 면장의 불망비가 내백마을과 지곡 남효마을에 세워졌었는데 현재 내백마을의 불망비만 마을입구에 보존돼 있다. 또 상백마을 뒤편으로는 골무산과 빈소산, 정루골 등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에는 넓은 들판이 많아 꿩이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 이 꿩을 잡아먹는 매가 산에서 춤을 추고 있어 매 골(鶻), 춤출 무(舞)자를 써 골무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까운 마을 뒷산은 웃음이 자주 나는 산이라 해 빈소(頻笑)산, 마을의 공동묘지로 쓰이던 옆 산은 정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정루(情淚)산이라 불린다. 돌무덤서 삼국시대 유물 발견 1972년 농지개량 사업으로 경지를 정리하다 삼국시대 말기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돌무덤에서 갑옷과 투구, 도자기 등이 발견됐다. 상백리 앞 도로와 금호천 사이에 폭 400m, 길이 약 2000m의 들 가운데 두 개의 돌무덤이 있었다. 당시 발굴된 유물은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일부만 진주·부산 등의 박물관에서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전까지 주민들은 이 돌무덤이 농지를 개간하면서 처리하지 못해 쌓아둔 돌인 줄 알았었다고 한다. 부장품이나 장신구는 없었지만 단갑과 괘갑 등의 갑옷이 발견돼 연구 자료로 활용됐다. 토기도 발견이 되었는데 일부는 주민들이 가져가서 팔기도 해 경찰서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금호강변에는 물레방앗간이금호마을은 중생원이라는 명칭이었으며 20세기 후반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금호마을 다리 옆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갔다. 전기가 안 들어올 땐 물레방아 돌려서 전기를 만들었으며 곡물을 찧었다고 한다. 또 상백마을 주민들의 연애 장소이기도 했다. 물레방아는 전기가 들어오면서 사라지고 그 때 쓰던 돌절구는 마을회관 앞에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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