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희재와 아랫희재, 황새골, 오리골이 합쳐진 4개의 마을이 모두 행정구역상 백현마을에 속한다. 오리골에서 불을 붙이면 불에 탄 재가 부채꼴 모양으로 핀다고 해 ‘흰재 또는 희재’라고 했다. 마을은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항아리처럼 생긴 지형이다. 때문에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전쟁 등의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마을 어디에서 봐도 탁 트인 산과 하늘의 경치를 자랑한다. 웃휘재 마을은 삼백년이 넘은 오래된 마을이다. 아래희재 마을은 1800년대 초에 삼척박씨가 마을을 형성했다. 아래희재 마을 서쪽 200미터 지점에는 삼을 삶았다고 해 삼굿거리라 불리는 곳이 있다. 1940년대에는 웃희재와 아래희재의 저수지를 만들고, 1970년대에 진입로를 확장하는 등 백전면에서 가장 먼저 새마을사업이 진행됐다. 또 백현마을은 ‘금연마을’로 유명하다. 마을에 금연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나면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도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백전면 백현마을(2019년 9월 현재)♧ 백전면 경백리 소재♧ 세대 54가구♧ 인구 82명(남38, 여44)♧ 주요농·특산물 : 단감, 벼 ♧ 이장 : 김동민 백전면 새마을운동 1호 마을로 예부터 살기 좋은 부촌 백현마을 사람들 사람 하나는 제일 좋다는 백현마을 주민들. 젊은 나이지만 4년차 경력인 김동민(사진) 이장, 12년 전 아무 연고 없이 백현마을로 귀농해 부녀회장을 맡고 있는 김지연씨, 마을 어르신들을 읍내로 오가도록 매일 트럭 운전을 하는 김종환씨 등이 있어 마을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취재를 위해 회관을 방문하니 주민들이 일찍이 점심을 먹고 상백현 마을회관에 모여 있었다. “사진을 찍을 줄 알았으면 입술(립스틱)이라도 하나 바르고 올 껄”이라고 노윤순 씨가 말하자 우택춘씨는 “우리 마을의 할머니들이 제일 이쁘다”고 자랑했다. 옛 어른들이 기억하는 과거 백현마을도 이웃 간의 정이 많고 재미있는 마을이었다. 동네 주민들은 낮에 일거리를 마치고 사랑방(마을회관)으로 밤 9시 쯤 모인다. 마을에 주민이 많을 때는 큰 방 두개가 가득 찼다. 이렇게 모이면 매일 ‘뻥’이라는 화투게임을 했다고 한다. 점수 내기를 해서 진 팀은 두부 1모, 막걸리 반병 등과 같은 간식거리를 샀다. 또 승패를 겨뤄 곡식을 조금씩 거두며 마을의 기금으로도 사용했다. 지금도 겨울이면 백현마을 부녀회장과 할머니들은 쌀을 집에서 조금씩 가져와 한 솥 밥을 먹는다고 한다. 김지연 부녀회장은 “마을 주민들이 같이 밥을 해 먹으니까 ‘한 솥밥 먹는다’는 옛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면서 가족보다 더 가까이 지내는 사이다.백현마을 귀촌 홍보대사 김지연(54)·최선도(58)씨 부부는 12년 전 백전의 벚꽃길과 백현마을의 돌담길에 반해 아무런 연고 없이 무작정 귀촌을 결정했다. ‘지리산 까망베리’라는 이름으로 블랙베리 농사를 직접 지어 판매하고 있다. 경기도 부천에서 백현마을 주민이 되어 부녀회장을 맡을 정도로 마을의 활기를 불어 넣는 인물이다. 카카오스토리(SNS)에는 백현마을에서 주민들과 장어를 잡아 구워먹은 이야기, 주민들과 나들이 간 사진 등의 일상을 올려놓아 인기가 상당하다. 장어를 잡아 마을 주민들이 회식을 하는 사진에는 ‘여기가 어디냐’는 댓글이 이어져 마을 홍보를 톡톡히 한다. 평소 사진 찍기와 글쓰기를 좋아해 귀촌한 백현마을을 주제로 영상을 만들었다. 영상은 경남 정보화 농업인 페스티벌에 출품해 UCC부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마을 저수지에서 큰 장어를 잡아 올린 것은 부녀회장의 남편 최선도씨다. 최씨는 백현마을 ‘맥가이버’로 통한다. 꼼꼼한 솜씨 때문에 이웃들의 가전제품이나 보일러 등이 고장 나면 척척 고쳐 준다. 덕분에 귀농·귀촌인이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11세대가 귀촌인들이라고 한다. 특별교통수단 종환씨 트럭 백현마을이 고향인 김종환(70)씨는 이 마을에서 단감농사를 짓는다. 현재 거주지는 함양읍이지만 백현마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그는 아침 8시에 백현마을로 출근을 해 마을 회관 앞에 모인 어르신들을 태워 읍으로 나간다. 마을 안까지 버스가 오지 않는 탓에 어르신들은 읍내나 면사무소를 다닐 때 그가 운전하는 트럭을 이용한다. 몇 년 전 부터 해왔던 일이 이제 그의 일상이 됐다.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병원으로 태워주고, 시장 봐주기, 세금내기 등 궂은일을 도맡는다. 그는 증조할아버지가 백현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던 천석꾼 집안 자손이란다. 한병일(71)씨는 19살 되던 때 김씨의 증조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는데 24명이 상여를 메고 운반했다고 한다. 한씨는 “마을길이 좁아 여러명이 상여를 메기 어려웠는데도 생전에 베풂을 실천해 마을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상여를 메려했다”면서 “그 때는 마을 중앙이나 우물가를 지나치면 안된다고 해서 마을을 빙빙 둘러 산꼭대기에 있는 산소까지 올라갔었다”고 했다.대학 졸업한 80세 수두룩 옛 백현마을에는 똑똑하고 부유한 사람이 많았다. 과거에는 경백리 일대 대부분의 논밭의 주인이 백현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웃희재 동네에만 동네 머슴이 15명도 넘었다. 또 일찍 개화된 마을로 옛날부터 서당이 있어 백전초등학교를 다니는 학동보다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한 때는 면서기 등 백전면 공무원이 거의가 이 마을 출신이었다고도 한다.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마을에 80세 넘은 노인 13분이 대학교를 나왔을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은 마을이다”라고 자부했다. 당시 초등학교를 입학 못한 학생들은 마을의 서당이라 불리는 초가집터가 2~3군데 있어 그 곳에서 한글과 한문을 깨우쳤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 마을의 훈장 어르신이 20~30대 청년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서당이 존재했다. 따라서 면서기는 기본이고 선생님, 박사, 초대 백전농협조합장, 종로학원 부원장 등 이 마을 출신 유명인사가 많다고 자랑한다.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자동차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절, 마을의 큰 도로는 없었다. 리어카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고갯길을 넘어 백전면 소재지 또는 물나들이장으로 주로 마을 사람들이 걸어 나갔다. 학생들은 이 길을 따라 학교를 갔다. 그 곳을 불미골이라 불렀는데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당과 큰 소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도로를 확장하면서 철거 됐다고 한다. 성황당이 철거될 때 동네노인들은 “자동차가 없는데 도로를 확장할 일이 뭐가 있냐”며 “성황당을 철거하면 마을이 망한다고 반발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차로 오가는 세상이 올 줄이야 알지 못했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세상은 빠르게 변했지만 마을의 성황당은 다시 복원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였다. 불미골을 넘어가면 4일과 9일에 물나들이 5일장이 섰다. 한때는 함양읍, 백전, 병곡, 전북의 아영과 인월 등 인근 영호남 주민들이 이용했던 제법 큰 장이었다고 한다. 소전은 없어도 돼지전, 잡화점, 곡물점 등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5일장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산업화로 점차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물나들이 시장은 사라졌다. 박사를 만든 마을우물 마을회관 옆으로 이어져 있는 돌담길은 마을 어르신들이 부역해 복원했다. 좁은 골목길을 확장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돌을 가져다 하나하나 쌓은 것이다. 길을 따라가 보면 창고처럼 단장한 마을 우물이 있다. 마을 권역사업을 통해 우물터를 보존하고 현대식으로 갖췄다. 과거에는 크기도 넓고 깊이도 1m50cm나 됐던 우물이다. 우물은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동네 소, 돼지 등 가축까지 모두 먹여 키우고도 남을 만큼 수량이 풍부했다. 부녀들은 이곳에서 빨래도 하고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해 주는 냉장고 역할도 했다고 한다. 김동민 이장은 “이 우물에 물이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면서 “신기하게도 여름에는 시릴 정도로 차갑고 겨울에는 김이 날 정도로 따뜻하다”고 소개 했다. 상수도를 이용하는 지금도 오염되지 않은 수질을 유지하고 있어 음용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어 한병일 씨는 “아마 우리 마을 사람들이 이 우물을 마셔서 박사도 나고 선생도 난 것 같다”고 전했다. 현재 이 우물은 마을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 회치를 하기 위해 닭을 장만하는 곳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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