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암마을은 마을의 형국이 배가 떠가는 모습이라 해 배 주(舟)자와 암석이 많아 바위 암(巖)자를 붙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이 배 모양을 닮아 동네 입구에 돛대를 세워두기도 했다. 2012년 발행된 함양군사(咸陽郡史)에는 ‘주암은 양지담과 음지담, 대밭말, 용소말이가 모여서 이루어진 마을로 덕암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이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도 지곡면에서 다섯 번째 큰 마을이라고 한다.예부터 각 도에 파견된 지방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정태현 관찰사가 오가던 곳이었으며, 선비들이 시를 주고받는 곳이었다. 때문에 산과 물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경치가 좋은 마을이다. “대학교수만 해도 10명이 넘게 배출 한 마을”이라며 이윤호(69) 이장이 주암마을을 구석구석 안내해 주었다.옛날 덕암리에는 개평마을과 더불어 과거시험에 합격한 분들이 많았는데 과거 급제 소식이 있을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동네에서 키우던 닭, 돼지, 소 등 가축이 밤 12시만 되면 한꺼번에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곡면 주암마을(2019년 8월 현재)♧ 지곡면 덕암리 소재♧ 세대 51가구♧ 인구 84명(남42, 여42)♧ 주요농·특산물 : 벼, 콩, 들깨, 고추 ♧ 이장 : 이윤호 양지담·음지담·대밭말·용소말 어우러진 덕암리 으뜸 마을 이무기 살던 ‘용소’마을에는 도숭사란 사찰이 있었으며 도를 깨우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합천 해인사 보다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마을 뒷산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사찰이 번창 했었다고 한다.어느 날 한 도인이 주지스님에게 “절이 더욱 번창하려면 마을 용소에 있는 이무기를 쫓아 내야한다”고 했다. 주지스님은 그 말을 듣고 밤낮으로 나무를 해 불을 피워 달군 돌을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용소에 던졌다. 물이 끓어오를 정도가 되자 이무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면서 인근의 언덕 산을 꼬리로 치고 달아났다. 이는 주지스님의 욕심이 절을 번창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망하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설이 전해지는 용소에는 이무기가 살았다는 동굴과 물 웅덩이가 깊게 파여 있다. 용소를 따라 계곡을 올라가다 보면 이무기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꼬리로 산허리를 빗겨 쳤다는 곳이 있다. 물이 곧바로 흐르다 이곳에서 꺾여 흘러간다. 물길은 거대한 하나의 반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윤호 이장은 용소를 가리키며 “물은 원래 똑 바로 흘러 내려가야 정상인데 이렇게 산을 갈라놓은 길로 돌 벽을 타고 꺾여 내려간다”면서 용소의 이무기 전설을 전해 주었다. 용이된 애기 소(沼)작은 폭포 줄기가 흐르는 애기 소에는 두 가지 전설이 있다. 주민들은 이 곳에 아기가 빠져 죽어서 애기 소라고 불린다고 했다. 물이 시퍼렇고 무서운 분위기가 난다해 귀신소라고도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우리고장 전설 집에 기록돼 있다. 애기 용소라 불리는 것은 하늘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선녀가 내려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이곳에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 용이 올라간 곳이 패어서 소가 되었다. 그 소를 애기 소라고 부른다. 사라진 숭양정의 기억 과거 정일두 선생의 후손인 정태현 충청관찰사가 지곡농협이 있는 자리에 살면서 경치 좋은 주암마을에 별장처럼 지어 놓은 정자가 숭양정이다. 지금은 관리를 하지 않아 빈터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수많은 선비들이 왕래하며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알려진다. 마을 노인회관에서 만난 김찬수(78) 박사가 어렸을 때 본 숭양정 터를 기억했다. 그는 “내가 기억할 때 숭양정 건물 사방에는 연못이 조성돼 있었다. 옆에 맑은 계곡물이 흘렀는데 지금보다 훨씬 수량도 풍부해 경치가 굉장히 좋았다”면서 “언젠가는 복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찬수 박사는 새마을연수원 교수로 정년 퇴직 후 새마을운동과 새마을 정신 등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발간했으며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또 함양군사 집필위원으로도 참여했다. 그는 퇴직 후 양주, 가평, 공주 등으로 귀촌을 알아보고 계약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고향인 함양의 경치가 좋다는 것을 알게 돼 귀촌 10년 째 이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주암 골짜기 촌놈이라고 놀림을 받았었는데, 지금은 마을에 흐르는 계곡과 맑은 공기가 촌놈이라 불려도 좋다. 주암마을 회관에서 김복점(78)·강계월(83)·윤복임(80)·강순남(86)·윤점이(81) 어르신이 모였다. 시집와서 주암마을에서 같이한 세월이 가족보다 가깝다. 마을회관에서 모여 고추따기 등 소일거리도 함께한다. 강계월 어르신은 주암마을에 태어나 주암마을의 남편과 결혼했다. “여기가 좋아서 멀리 안 갔지. 어디 갈 줄도 몰랐고 그 때는 함양읍에도 생전 안 다녀봤다”고 했다.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주암마을까지 오는 버스가 없어 중학교 때부터 함양읍에서 자취를 시켰다. 김복점 어르신은 안의 숙림마을에서 시집왔다고 한다. 주암 골짜기로 시집을 오니 마을에는 아무 소식도 들어오지 않았다. “라디오도 없제, 텔레비전도 없제, 완전 오지 마을이었다. 그러다 시집와서 한참 뒤에 스피커가 들어와 바깥소식을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제일 처음 텔레비전을 산 사람이 무료로 동네사람들에게 볼 수 있게 해 줬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들이 저녁만 먹으면 일도 안하고 텔레비전을 봤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내가 좋아 아내의 고향인 주암마을에서 60여 년 넘게 살고 있다는 박동식(89) 어르신은 내년이면 90살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무색하게 건재한 모습을 보이며 마을의 중요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이날 마을회관의 급식도우미 지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주민들과 결정하기로 했다. 그는 “지금은 젊은 사람들의 시대이지만 나(나이)많은 사람을 몰라보면 안된다. 본인도 언젠가 늙을 것 아닌가. 젊은 사람은 나 많은 사람을 존경하고 나많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을 아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칡넝쿨로 옮긴 돌다리 주암마을의 양지담과 음지담을 잇는 새 길이 생겨나기 전에는 산 언덕을 하나 넘었어야 했다. 같은 마을이지만 양쪽으로 분리된 지형이다. 그 길에는 도랑이 하나 있는데 도랑을 건널 수 있는 큰 돌 다리를 만들어놓았다. 고인돌 모양의 돌을 하나씩 옮긴 사람이 강계월 어르신의 남편 증조할아버지다. 그 할아버지가 칡넝쿨을 감아 돌을 등에 지고 옮겼다고 한다. 돌 하나에 수백 킬로그램은 족히 돼 보인다. 힘이 장사였다는 게 동네 어르신들의 전언이다. 이 돌다리가 만들어진지는 최소 120년은 됐을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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