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타인보다 우월하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시시때때로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을 보고 안도감을 느끼며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게 된다. 이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써 보이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용된 범위는 ‘안도감’을 느끼는 바와 같이 타인에 대한 마음속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지 외면적으로 우월감을 표출하게 되면 모종의 불편함을 마주하게 된다. 이 불편함은 곧 사회의 융합에 반하는 서로 간의 ‘혐오’라는 정서가 되었고 상호 간의 혐오로 인해 전쟁, 테러, 핍박 등 많은 피해를 입어온 사람들은 그제야 ‘평등’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된다. 이는 선진국들에게는 이미 100년 전의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일부 국가들에게 있어서는 지금도 피를 적셔가며 진행 중인 이야기이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은 1945년 광복 이후, 1948년 제헌국회가 헌법에 ‘평등권’의 내용을 명시함으로써 실정법상 ‘평등’의 개념이 적용되어 왔다. 대한민국에서의 평등은 단순히 사회적 특수 계급을 부정하는 목적 외에도 여러 의미가 있다. 먼저 우리가 ‘평등’이라고 하면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으로 나뉘게 된다. 형식적 평등이란 기회나 결과가 동일한 상황으로 나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평등의 의미이다. 반면 실질적 평등은 형식적 평등으로만은 보장하지 못하는 영역의 평등을 보장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달리기를 하려는데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과 일반인을 평등하게 하자고 할 때 출발선의 평등(절대적 평등)을 만족시키고자 출발선을 동일하게 놓으면 되지만 이는 결코 완전히 평등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 평가하려는 것, 차이를 인정하는 것, 무시하기로 한 것 외의 나머지 것들을 동일하게 놓는 것이 실질적 평등이다. 차이를 인정하려는 것이 무엇이고 나머지 것들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 진정한 실질적 평등이 무엇인지는 사회구성원들 간의 논의를 거쳐서 정해진다. 그래서 실정법상 실질적 평등의 지위가 인정됨에도 실질적 평등의 공식이나 정답은 없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평등을 논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다. 우리 사회는 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차별 금지법,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 등 개인의 성향에 따라 찬성과 반대가 극명히 갈리는 이러한 문제들은 기본적으로 평등과 관련된 문제들이기도 하다. 이때 사회적 약자의 평등을 반대하는 이들의 입장은 대부분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특정한 이유(성별, 종교, 출신 지역,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장애, 그 외)를 들어가며 이에 해당되는 자들은 평등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본인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인격체는 평등할 자격이 없고 차별을 받아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평등이란 이미 평등해야 할 자와 평등하지 않을 자를 나누는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평등이 아닌 것이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