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 서하면 해평마을은 옛날 안의군 서하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굴어촌(窟魚村)’이라 불려왔다. 마을 뒷산에 호랑이가 살았는데 그 호랑이 굴에서 물고기가 나와 마을 앞 냇물에서 서식했다는 전설에서 지명이 유래됐다. 이후 마을 앞 냇물과 들이 편평하고 넓게 트인 바다 같다고 해서 ‘해평(海坪)’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옥한마을의 저수지에서 송계천으로 물이 흐르고 마을 뒤로는 뾰족한 ‘내막재’ 산이 있다. 해평마을은 파주염씨가 마을을 이루었던 집성촌이다. 염씨 집안의 정자인 ‘관운정’을 비롯해 풍류를 즐길 수 있는 마을 정자가 여러 개 있는 것도 특징이다. 함양읍에서 백전면을 지나 백운산 고개를 넘으면 서하면 소재지에 닿기 전 운곡리에 위치해 있다. 백운산 골짜기라고 해서 운곡리라 불리는데 은행마을 옆으로 해평마을이 보인다. 백전면에서 서하면까지의 코스는 벚꽃 길을 따라 도로양편에 이어지는 풍경을 보며 드라이브를 즐기기에도 좋다. 서하면 해평마을(2019년 8월 현재)♧ 서하면 운곡리 소재♧ 세대 42가구♧ 인구 75명(남34, 여41)♧ 주요농·특산물 : 사과, 인삼 ♧ 이장 : 안영준 “마을 앞 냇물과 들 바다처럼 평평” 여름날 주민들의 사랑방 ‘정자’ 마을에는 벼, 콩 등 밭작물 농사를 짓다 최근 인삼과 사과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요즘같이 더운 여름 날 오후에는 밭일을 하러 가지 않는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 둘 정자에 모였다. 남자들은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에, 여자들은 마을 안 쪽 해평교회 인근에 위치한 정자에 따로 모여 있었다. 마을 입구 정자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며 염금석(82)·박종길(82)·염태식(86) 씨가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11대가 이 마을에서 살았다는 염금석 씨가 마을 이야기를 들려준다. 염씨 집성촌답게 과거에는 70%이상이 염씨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 때는 마을 인구도 많았다며 선거 유권자가 90여명이었다고 말했다. 염씨는 “해평마을이 과거 ‘굴어촌’이라 불렸던 것은 뒷산에 호랑이가 많아서 호랑이가 내려오면 잡아먹힐까 싶어 사람들이 굴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을 사람들을 굴어촌 사람이라 했다케”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르신들께 들었던 이야기라고 한다. “전쟁 안 겪어본 사람은 몰라”“옛날 같았으면 이렇게 앉아서 놀 여유가 없다. 짐승을 먹이러 다니고 퇴비를 매일 만들어야 했다”고 해평마을의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염태식(사진) 씨가 말했다. “대동아(태평양) 전쟁, 6.25전쟁, 보릿고개 안 넘어 본 사람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말해도 모른다. 옛날 촌에 살던 서민들은 완전히 일만하고 살았다. 사람 사는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대동아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인 태평양 전쟁(1941~1945)을 말한다. 동네에서 대동아 전쟁을 겪은 사람은 본인뿐이란다. 당시 10대였던 염태식 노인회장은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농민들은 1년 내내 농사를 지으며 열심히 일했지만, 일본군이 전쟁에서 사용할 식량 확보를 위해 ‘공출’이라고 해서 농산물을 다 빼앗아갔다. 농산물뿐만 아니라 총알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놋으로 만든 유기도 수탈당했다. “집에 숟가락 빼고는 다 가져갔다. 30여 년 동안 완전히 일본 종노릇을 한 거야. 1년 농사를 지으면 1마지기에 쌀 4가마니가 나왔는데, 그 중 2가마니는 왜놈들한테 공출을 했어. 그러면 집에 먹을 식량은 2가마니 밖에 안 남는데, 겨울까지 버틸 수가 있겠어. 공출을 내지 않으면 기다란 칼자루를 찬 사람이 칼을 여기저기 쑤시며 다녔지. 억울해도 무서워서 안 내면 안 되는 기라”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더위 이기는 ‘민화투’마을에는 창문과 방충망이 설치 돼 있는 최신식 정자가 하나 더 있다. 박봉순(84), 오영자(78), 김영순(68), 이영순(57) 씨의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영감 붙어라. 초단 두 개, 홍단 두 개.” 5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이 어울려 민화투 놀이로 폭염 속 하루를 보낸다. 한 번 모여서 놀다보면 해가 지는 줄 모른다고 한다. “도박은 아닙니다(하하), 쌈장 통에 모아둔 동전으로 놀고 다시 그 돈을 다 넣어놔요. 더워서 밭에도 못나가고 재미로 앉아서 이거라도 해야 시간이 잘 간다.” 박봉순 어르신은 이 중에서 가장 고령자이다. 그는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은데 젊은 사람들이 잘 데리고 놀아 준다”며 부녀들을 칭찬했다. 해평마을의 부녀회장직을 18년 동안 맡았다는 김영순 씨도 “어른들이 동참을 많이 해 주시고 잘 협조해 준다”며 되받는다. 대한민국에서 신랑이 제일 좋아 21살에 해평마을로 시집왔다고 한다. 시집을 올 때는 마을길이 좁아 차가 들어올 수 없었다. 서하면 소재지 쯤 버스에서 내려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시집올 때 예쁘게 올림머리를 하고 마을에 왔는데, 그 머리가 풀어지면 다음 날 친정에를 못가잖아. 그래서 엎드려 잤다”며 풋풋했던 신혼 첫날을 기억해 낸다. “나는 거창에서 버스 타고 왔어요.” 가장 젊은 나이인 이영순 씨가 시집을 올 때는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길이 확장돼 버스가 들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도란도란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며 더위를 잊은 듯하다. 세 살배기는 마을의 보물 화투 삼매경에 빠졌던 어르신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아이가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왔다. 이영순 씨의 손녀 가온(사진·3)이다. 주민들은 이 세 살배기 아이가 ‘마을의 보물’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에서 시집을 왔다던 민소마니(26) 씨는 2년 전 한국으로와 산청에서 신혼집을 꾸렸다. 첫째 가온이가 생겨 남편의 고향인 해평마을로 왔다. 뱃속에는 10월에 출산 예정인 둘째도 있다. 건너편 은행마을에는 친구도 있다고 한다. 이영순 씨는 “먼 나라에서 시집을 와 적응을 잘 한다”며 딸처럼 예쁘다고 칭찬 했다. 주민들은 큰 걱정이 하나 있다. 마을 식수로 사용하는 지하수 수질 검사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염태식 노인회장은 수질 개선 문제가 빨리 해결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마을에는 지하수를 상수도로 사용하는데 물이 점점 나빠진다. 군에서 먹으면 안된다고 해서 물을 먹지도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치질 하고 채소를 씻어 먹는 물로 사용하데 기분이 영 찜찜하다. 몇 번 이야기를 했는데도 개선이 안 된다. 데모라도 해야 들어 줄까 싶다.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며 주민들의 원망이 폭발직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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