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곡마을은 유림면의 서남쪽에 위치해 예로부터 지리산 계곡에서 흘러온 맑은 물과 공기가 좋은 곳으로 소문난 곳이다. 마을 앞은 엄천강이 흐르고 뒤로는 매봉산과 등까끔, 코재(코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 코재라 불림)가 병풍처럼 감싸 안은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청정한 지리적 조건과 마을 주민들의 인심까지 좋아 귀농·귀촌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과거에는 100여 가구가 넘는 주민들이 손곡마을에 살았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내부까지 10여개의 주점이 있었다. 입구에는 정자나무(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70년 전까지는 7그루가 있었다고 해서 7형정이라 불렀다. 여름철 정자나무 밑 주막에서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주민들의 갈증을 풀어주곤 했다. 또 2000년대 초까지도 7형정 나무에서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에게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왔다. 현재는 7형정의 나무 3그루 만 남아있으며, 당산제도 사라졌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자주 모여 화합하고 소통하는 전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유림면 손곡마을(2019년 7월 현재)♧ 함양읍 손곡리 소재♧ 세대 59가구♧ 인구 83명(남 38, 여 45)♧ 주요농·특산물 : 블루베리, 새송이버섯, 양파 ♧ 이장 : 강병규 “가난했던 시골마을에서 귀농·귀촌 1번지로” ‘1인 1닭’으로 복날 잔치 주민들이 꼽는 마을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주민간 화합이다. 지난 7월22일 오전 10시 취재진이 손곡마을을 찾았다. 태풍 ‘다나스’가 지나간 다음날이다. 평소 마을 대청소를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는데, 이 날은 태풍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대청소를 하게 됐다. 그런데도 이른 아침부터 많은 주민들이 동참했다. 주민들은 이날 아침 7시부터 의기투합해 태풍으로 인해 어수선해진 마을 길과 하천 주변을 말끔히 청소 했다. 청소를 마친 30여명의 주민들이 정자와 포구나무(팽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60대부터 가장 나이가 많은 93세 할머니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한 곳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마침 이날은 삼복 중에서 중복인 날이기도 했다. 강병규(사진·68) 이장은 대청소를 마친 어르신들에게 읍까지 나가 사온 떡과 옛날 통닭을 나누어주었다. ‘1인 1닭’이란다. 강병규 이장은 “예전에는 가마솥에 백숙을 끓여 마을잔치를 했는데 요즘은 음식을 준비할만한 젊은 사람들도 없고 해서 간편하게 복날을 지낸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이렇게 챙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동네사람들이 모여 함께 먹으니 더 맛있는 것같다”며 흡족해 한다. 할머니들의 꽃다운 시절정자 마루에는 할머니들이 모여 있다. 꽃다운 10대, 20대에 시집을 와 수 십년의 세월을 손곡마을에서 함께 보냈다. “안주가 좋으니까 술을 한잔해야겠다. 쪼매있으면 병들어서 못 먹으니까 많이 먹어야지”라며 서순이(81) 할머니가 닭다리 하나를 건넸다. “아가씨가 날개를 먹으면 바람나서 안돼”라며 날개는 본인이 드신다. 18살 때 동강마을(휴천면)에서 시집와 86세인 남편과 백년해로 하고 있다. “시집와서 손으로 땅 파고 남의 일을 해가꼬 살았었지. 그런거 아니면 우리 동네는 특별한 게 없어서 굶었다. 그때는 먹고 싶어도 먹을 게 없어 못 먹었는데, 지금은 먹기 싫어서 안 먹는다”고 했다. 이옥희(72) 할머니는 산청군 방곡마을에서 20살 때 시집 왔다. “산청도 시골이지만 여기에 시집왔을 때는 더 시골마을이었다. 그 때 방곡 사람들은 전부 다 머리에 파마를 했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파마도 안했었다”고 했다.정점선(80) 할머니는 얼마 전 염색과 파마를 해서 검은 머리가 돋보였다. “머리는 염색을 해서 검은데 나이가 많다. 부끄라버서 갈치주도 몬해.” 정점선 할머니는 인근 마을에서 19살 때 시집을 왔다. 옆에 있던 박필선(82) 할머니는 “내가 아기 하나 놓고 있으니까 이 할매가 시집 왔다”고 했다. 지금은 자식들이 다 잘 커서 미국에 있다고 한다. 박필선 할머니는 “자식들 덕분에 미국에 자주 갔는데 외국인들이 인사성이 밝다면서 ‘할로, 하이’하면 다 통한다”며 영어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내 이름은 ‘투 쓰리 텐’ 손곡마을은 59가구 중 3분의 1정도가 귀농‧귀촌 가구다. 주민들은 함양군에서 단일 마을로는 귀농‧귀촌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마을 일 거라며 도시인들에게도 인기 좋은 동네라고 자랑한다.대부분 정년퇴직 하고 손곡마을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귀농·귀촌인이지만 그래도 이 마을에서는 젊은 층에 속한다. 그들은 언제나 마을 일꾼을 자청해 어르신들을 챙긴다. 어르신들 또한 이들을 반기고 예뻐한다. 고향이 김해인 강병규 이장은 부산에서 생활하다 퇴직 뒤 귀촌했다. 벌써 귀촌 13년차다. 마을 사람들은 제일 심부름을 잘해 이장으로 뽑았다고 한다. 3년 째 이장을 맡고 있다. 그는 “다른 마을에 비해 축사가 주변에 없어서 냄새가 안 난다. 산으로 이루어진 뒷 배경도 괜찮고 조용해 살기가 좋은 동네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로 귀촌한 분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13년 전 손곡마을의 첫 번째 귀촌자였던 강병규 이장은 본인이 귀촌한 이후 줄줄이 귀촌인구가 늘어났다고 했다. 실제로 지인 중에서도 마을에 놀러왔다가 정착한 사람도 있다. 강병규 이장의 옆에서 보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이삼열(사진·65) 씨도 작년에 김해에서 손곡마을로 귀촌했다. 함양, 산청, 밀양, 고성 등으로 정착할 곳을 찾아다니다 손곡마을을 둘러보고 이틀 만에 결정했다고 했다. “제 이름은 ‘투 쓰리 텐’입니다. 이장님의 쫄병(부하)이에요”라며 에너지 넘치는 말투로 마을 주민들과 농촌생활을 적응하는데 재미있다고 했다. 우리 손으로 만든 마을 손곡마을에서 태어난 정진호(사진·77) 노인회장이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을 학생들은 면 소재지에 있는 유림국민학교를 다녔다. 마을 인근 화남분교는 한참 뒤에 생겼는데 학생들이 줄어 30년을 이어오다 폐교됐다고 했다. 1970년대부터는 새마을운동으로 마을 정비가 이루어졌다. 정 노인회장이 20대 때 주민들과 함께 도로와 창고 등을 직접 지으며 마을을 가꾸었다고 했다.정진호 노인회장은 “우리 손으로 마을창고를 지었다”며 정자 앞에 있는 창고를 가리켰다. “강에서 손수 시멘을 개고 돌을 구해왔다. 지게를 짊어지고, 리어카를 끌고 큰 도로가 없었던 오솔길을 오가며 터를 닦았다.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고 나르느라 모두 욕봤다”고 말했다. 마을 정비를 하면서 주민들끼리 막걸리를 마시곤 했는데 하루에 그 양이 20말(약 360리터)이라고 했다. “그때는 소주, 맥주가 없으니까 주로 막걸리를 먹었다”고 했다. 술은 도가(양조장)에서만 공급했다고 한다. “술을 몰래 담가 먹다가 걸리면 밀주(密酒)라고 해서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집집마다 쌀이나 옥수수 등을 이용해 술을 만들어 먹게 되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이 더 줄어드는데다 세금도 거둬들일 수 없어 밀주를 철저하게 단속했던 것 같다고 한다. 엄동설한 대추를 열게 한 효심 마을에는 효자 신효선의 조목단(대추나무) 전설이 있다. 신효선은 거창 신씨의 후손으로 마을에서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 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었다고 한다. 평소 부모님을 위한 일이라면 정성을 다했다. 어느 겨울날 마을을 지나가는 도인이 아버님의 병환에 풋대추가 약으로 좋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풋대추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공동우물가에 있던 대추나무 앞에서 밤새도록 빌었다. 다음날 아침 고개를 들어보니 그토록 원하던 풋대추 수 십개가 나무에 달려있었다. 그 대추를 먹고 아버지의 병환은 점차 호전되었다는 전설이다. 그 후 주민들은 이 대추나무를 베 마을 앞 다리를 놓았다. 홍수가 나 다리는 무너지고 나무도 다 떠내려갔다. 그런데 이 대추나무만 마을 앞으로 거슬러 올라와 마을 사람들과 그의 후손들이 그 자리에 조목단을 세우고 신 씨의 효심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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