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보다는 문짝 만드는 게 돈벌이가 되겠다 싶어 이 길을 택했다. 반백년 세월을 한걸음으로 달려왔다. 10여 개나 됐던 목공소도 하나 둘 사라졌다. 이제 함양군 유일의 전통 한옥문 제작 목공소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함양읍 용평6길 13 학당문집 김윤복(66) 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태어난 전후 1세대다. 4남 1녀의 막내인 그는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아버지마저 일찍이 여의었다. “내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중학교 진학은 호사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내 앞가림이라도 하는 것이 당연했다.” 김 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읍내 가구공장에 일자리를 구했다. 취업이라기보다 기술을 배우기 위한 과정이다. 어린 나이에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깊었던 모양이다. 같은 목공기술자지만 가구보다는 문 만드는 기술자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전쟁의 상흔이 차츰 아물고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새집을 짓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자연스럽게 문짝의 수요도 늘어나고 있던 때였다. 당시는 가구를 장만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나무문이 훨씬 돈벌이가 될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6개월 만에 가구공장을 그만두고 나무문을 만드는 목공소로 일터를 옮겼다. 14살 어린 나이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평생 전통 한옥문 장인으로 살아 온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금의 용평리 학당문집은 네 번째 옮겨온 삶터다. 그는 18살 때 자신의 목공소를 차려 홀로서기를 선언했다. 그가 태어난 교산리 학당에서 톱 작업대(선반)와 전동대패 한 대씩을 갖추고 목공소를 시작했다. 이후 한징기(함양읍 본백마을)와 인당마을을 거쳐 1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목공소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했던 톱 작업대와 전동대패, 학당문집이라는 상호는 50여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건재하다. 50평 남짓한 목공소에는 이름도 생소한 목공용 기계 10여대가 김 씨의 수족 노릇을 한다. “예전에 이런 기계들이 없었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지금도 전통 나무문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기계가 들어오면서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고 했다. 끌과 망치로 일일이 홈을 파고 톱으로 잘라 길이를 맞춘다. 문살로 여러 가지 모양의 문양을 연출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고단한 일정이다. 기계의 도움을 받더라도 한 짝을 만드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문은 이틀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는 “전통 나무문은 문살 모양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는데 그중에서 팔각살문과 거북살문, 빗살문이 가장 만들기 까다롭다”고 했다. 치수나 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안되기 때문이다. 김 씨의 곁에는 40여 년 동고동락하며 그의 보조이자 대변인을 자청하는 아내가 있다. 박귀녀(62) 씨다. 박 씨는 “일이 한창 많을 때는 작은 목공소에 직원이 두 명이나 됐지만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해 밤샘 작업을 하는 날도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그때는 함양읍에서 주문하는 물량도 다 쳐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거리가 먼 마천이나 서상·서하에서는 의뢰가 들어와도 그곳까지 갈 시간이 없어 주문을 못 받았다”면서 “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손님이 뚝 끊겼다”고 했다. 학당문집은 몇 년 전부터 보폭을 넓혔다. 한옥뿐만 아니라 아파트 붙박이장, 창문, 싱크대 등 전통 나무문을 응용한 가구와 한옥문 창호도 제작해 납품하고 있다. 고풍스러운 멋에 세련미를 더해 새로운 감각의 인테리어로 선호도가 높다. 진주나 창원은 물론 멀리 경기도까지 일이 있는 곳이면 원정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제작한 전통 한옥문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지난해 문을 연 최치원역사공원 내 사당과 향토기업 인산가 문화관을 장식한 전통 한옥문이 대표적인 그의 작품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