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읍에서 기타학원을 운영하는 전영욱(63) 원장은 음악과 서예 등 서로 다른 장르를 넘나드는 종합예술인으로 통한다. 실력도 취미수준을 넘어 수강생을 지도할 수 있을 만큼 수준급이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몰입하는 스타일이라는 그는 서예와 기타뿐 아니라 가야금 연주 실력도 출중하다. 그는 “기타와 가야금이 동(動)이라면 서예는 정(靜)이다”며 “악기와 서예는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더없이 좋은 조화”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지난 2000년 함양으로 귀촌하기 전까지 쭉 부산에서 생활했다. 그는 중학교 때 친구가 치는 기타소리를 듣고 기타에 빠져들었다. “기타 소리가 마치 천둥 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지금도 그때 가슴 터질 듯이 뛰던 심장박동이 생생하다”고 했다. 기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학원에 등록했다. 방과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타학원으로 달려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하늬바람’이라는 그룹사운드 멤버로 활동하며 7~80년대 부산의 밤무대를 주름잡았다. “당시는 지방에서 음악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은 나이트클럽이 유일했던 시절”이라 “밤에 일하고 낮에 잠자는 올빼미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그는 밤에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면서도 낮 시간을 이용해 서예를 배우고 음악학원 강사로 일하는 1인3역을 했다. 밤무대 생활은 10년 넘게 이어졌고 점차 서예 실력도 늘어 전국 서예대전과 부산시전에 잇따라 입상해 1983년 부산시전 작가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그룹사운드 활동을 접고 서실(서예학원)을 열었다. 가야금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서실과 같은 건물에 가야금 학원이 있었는데 기타와는 또다른 느낌의 가야금 소리에 매료됐다. 전 원장은 자신은 “스승 복이 많았다”며 “서예는 석정 김성균 선생의 사사를 받았고 가야금은 작고하신 강문덕 선생에게 배웠다”고 했다. 각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분들이라고 한다. 1989년 결혼하면서 학원을 정리하고 골프장 조경사업에 뛰어들었다. 10년 동안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하지만 그도 국제구제금융이라는 IMF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됐다. 눈도 급격히 나빠졌다. 피폐해진 심신을 달래기 위해 2000년 지리산을 찾았다. 휴천면 모전마을에 휴양차 둥지를 틀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빈털터리를 따뜻하게 맞아준 마을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한다고 했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고는 10년 넘게 손을 놓았던 붓과 악기를 들었다. 붓글씨를 쓰며 한시(漢詩)도 공부하고 악기도 연주했다. 잊고 지냈던 예술혼을 되살려 냈다. 함양여중에서 방과후학교 기타강사 제의가 들어오면서 10년전 함양읍으로 거처를 옮겼다. 전 원장은 “다른 사람들은 제가 예술에 타고난 소질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순전히 노력의 결과”라며 “최소 10년 이상은 꾸준히 노력해야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이자 기타의 거장으로 불리는 에릭 클랩턴과 토미 엠마뉴엘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도 그들이 노력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의 기타 연주 모습은 학원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전 원장은 기사모(기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2년 전 동문사거리 인근에 함양기타학원을 열었다. 주로 일반인들을 위해 강습하지만 다문화 자녀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초·중·고생은 무료로 지도한다. 그는 함양군종합복지관에서 운영하는 기타 초·중급반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기타학원 원장으로서 “제일 목표는 수강생이 기타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잘 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모든 예술은 땀과 노력의 결과”라고 조언한다. “그동안 이웃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 이상으로 자신의 재능을 나눠드리고 싶다”는 전영욱 원장은 최근 신축 개원한 함양문화원에 서예작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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