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을 통해 2006년에 남편을 만났습니다. 2006년 말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 남편은 결혼 절차를 완료하려고 베트남 관광지를 구경하기 위해 며칠 동안 베트남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함께 남서부의 아름다운 경치를 돌아보고 저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때 저는 한국어를 잘 몰랐으므로 통역사와 함께 갔습니다. 부모님 집에서 남편을 데리고 친척과 이웃을 맞이했습니다. 그날 부모님은 작은 파티를 열어 모든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통역이 있어서 채팅하는 동안 식사를 맛있게 먹으며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날 저녁, 저의 삼촌은 한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은 친척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손동작과 함께 말했습니다. 통역사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남편의 집은 지금까지 한 가지 전통 야채를 재배했다고 합니다. 저는 통역사 옆에 앉아 있어 그 전통 야채 이름은 무엇이며 베트남에 그 야채가 있는지 없는지 물었습니다. 통역사는 처음과 똑같이 통역되며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한국에 갈 때 알게 될 것이므로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비자를 기다리는 6개월 후 2007년 초에 저는 한국에 왔습니다. 많은 베트남 사람들의 비전은 한국이 선진국이어서 매우 번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천 공항에서 시집에 가는 길이 몇 번 잠에서 깨어나야 남편 집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괜찮아서 그땐 4월이라서 기후는 시원했고 꽃은 길을 따라 피어났으며 평화롭고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고향에서 저는 통역사가 말한 전통 야채가 양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왜 통역사가 양파라는 말을 모르고 있었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갑자기 생각이 나고 저의 남편이 사투리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양파가 ‘다마내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솔직히 양파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양파를 재배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한국에 와서 양파를 재배하는 과정을 알게 되고 남편과 직접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남편이 다른 곳에 일하러 갔었으며 집에서는 시부님이 작은 논에 양파를 조금만 심었습니다. 하지만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남편은 집에서 양파를 재배하는 일만 했습니다. 남편은 온 가족을 부양할 만큼 충분한 돈을 갖기 위해 많은 양파를 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5~6년 동안 저는 집에서 출산하고 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가족부양에 대한 부담이 얼마나 컸을까요? 두 자녀를 더하게 되니 우리 가족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남편의 어려움은 두 배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족의 필요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항상 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양파 재배하는 과정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됩니다. 시간이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벼농사를 수확하고 나서 남편은 밤낮으로 논을 갈아서 적시에 양파를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남편뿐만 아니라 모든 농부들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력의 대가로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하고 열심히 일한 후 밤에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농부들은 평균적인 결과만 필요합니다. 우리 농민들이 항상 직장에 있을 수 있는 안전한 결과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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