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죽음으로 인해 육신을 벗어나서 가야될 영혼의 고향(저승)을 가지 못하고 홀로 불행하게 떠도는 영혼을 ‘귀신’이라 한다. 이러한 귀신은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죽거나, 지독한 고통을 수반하며 죽거나, 원통해 하며 죽거나, 죽어서도 사람들을 보호해 주려고 남을 수도 있다. 죽음 이후에 남아있는 귀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저자 마이클 뉴턴의 ‘영혼들의 운명’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서 필자의 개인적인 관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논란이 있으므로 이 글의 내용이 불편한 일부 독자 분들은 “그냥 이러한 관점도 있구나”라고 가볍게 넘어가주기를 바란다. “귀신은 자신이 죽은 것을 모르거나 자신의 환경에서 어떻게 탈출해야 될지 그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귀신들은 갇혀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갇힘은 물질적인 장벽 때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롭지 못한 정신적인 조건 때문인 것이다. 영혼들은 어떤 한정된 차원(아스트랄 플레인) 안에서 길을 잃는 법이 없으며, 영혼들은 자신이 지구에서 삶을 마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혼들의 혼란은 어떤 장소, 어떤 사람, 어떤 사건을 놔주지 못하고 집착하는데 있다. 갈 데로 못가고 있는 것은 자발적으로 결정한 바이다. 영혼이 마치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려 지구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안내자(일명 저승사자)는 억지로 우리들을 영혼의 세계로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을 안내하는 안내자들은 혼란스럽거나 방황하는 영혼들의 때를 살펴보며 기다려 준다. 죽음 이후의 경험에서도 자유 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의 안내자들은 영혼들의 명석하지 못한 결정도 존중해준다. 그리고 시간이란 것이 영혼의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못 지닌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죽은 사람은 머릿속에 시간관념이 없으므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며칠, 몇 달, 몇 해를 지상에 대한 미련으로 머무르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귀신’이라 부른다. 영국 성곽에 400여년을 머물다가 마침내 영혼의 세계에 돌아간 귀신은 그 동안을 40여 일, 심지어는 40시간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귀신들은 지구적인 것에 오염되어 떠나는데 곤란을 겪는 좀 덜 성숙한 영혼들이다. 지구의 햇수로 오랜 기간 떠나지 못하는 경우는 특히 영혼의 성숙도와 관련지어 볼 수가 있다. 영혼이 육체의 죽음 뒤에 남는 이유는 다양하다. 인생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끝났을 때 영혼은 행로에서 이탈할 수 있다. 이 경우의 영혼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훼방 당했다고 느낀다. 귀신이 되는 죽음은 지독한 고통을 수반한 경우가 많다. 또한 드물지만 영혼들은 위험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려고 남아서 노력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영혼이 내정되어 있는 카르마의 방향이 자신의 생각과 달리 갑작스레 변한 것에 대해 예상치 못했다는 느낌뿐 아니라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들어 혼란을 일으켰을 때도 귀신이 된다. 살해당했거나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필자는 과거 동부산대학교 ‘장례풍수학과’를 졸업하면서 장례지도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그 때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는 ‘웰 다잉(Well–dying)’에 관한 개념을 접하면서 죽음 이후의 삶과 전생, 윤회에 대한 공부까지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에 대해 지금도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참고로 웰 다잉(Well–dying)이란 인생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인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는 것을 말하는데, 고령화와 1인 가구의 확산으로 고독사가 급증하면서 웰 다잉(Well–dying)이 주목받고 있다. 그리고 그 때 처음 알게 된 것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장례절차 중에 하나인 ‘고복皐復’으로, ‘초혼招魂’이라고도 한다. 혼을 부르는 의식으로, 운명을 하면 고인의 속적삼이나 상의를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거나 마당에 나가 왼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해 옷을 휘두르면서 먼저 고인의 주소와 성명을 왼 다음에 큰 소리로 길게 ‘복復! 복復! 복復!’하고 세 번 부르는데 이를 고복皐復이라고 한다. 고복皐復은 죽음으로 인해 나간 영혼이 다시 돌아와 몸과 합쳐져 살아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살아나지 않으면 비로소 죽은 것으로 인정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극히 일부지만 실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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