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시간은 어느새 나를 뻐꾸기 우는 계절로 데려다 놓아 버렸다. 붉은 꽃이 떨어지고 나면 초록 잎은 더욱 짙어진다고 했던가. 꽃들이 사라지고 연두빛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살찌고 있었다. 녹음이 짙어지고 있는 유월, 지곡면에 있는 정취마을을 찾았다. 정취마을은 주위에 호박들샘을 비롯하여 네 개의 마르지 않는 샘이 모여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전에는 정추(井甃)라고도 불렀다. 정취마을에는 정산서원이 있다. 그리 알려진 서원이 아니어서 이정표가 없었다. 허나 마을을 걷다보면 서원을 만나기 마련이었다. 마을 북쪽 입구로 들어서서 조금 걸어 내려오면 왼쪽으로 좁은 골목길이 나타났다. 서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좁다란 길을 따라가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마주쳤다. 마치 두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을 향해 비상을 꿈꾸는 모습이었다. 푸른 나무를 잠시 바라보고 있으니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농번기라 그런지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개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꼬리를 흔들며 악착같이 짖는 소리는 경계의 행동인지 반가움의 표현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캉캉거리는 외침을 들으며 홍살문에 들어섰다. 정산서원은 급천재와 사우(祠宇)로 지어졌다. 하양허(河陽許)씨의 소유이며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았다.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 둔남(遯南) 허방우(許方佑), 삼원(三元) 허원식(許元栻)을 배향하였다. 옛날 서재(書齋)가 화재로 인해 완전히 타 버리자 후손들이 1853년(철종 4)에 옛 터 왼쪽에 서재를 새로 지었다. 그리고 강당에 급천재(及泉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급천재는 소박하고 아담했다. 맞배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이었다. 가운데 중당을 두고 양쪽에 방이 있는 형태였다. 햐얀 한지를 바른 창살문, 붉게 녹슨 문고리, 자그마한 강당의 마루·····. 공간도 시간도 모두 오래된 것들이었다. 오래된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요만 가득한 중당에 먼지가 시간의 찌꺼기마냥 내려앉아 있을 뿐이었다. 강당 툇문을 열면 문 뒤에 가만히 숨어있는 바람이 와락 달려 나와 나를 맞아줄 것도 같았다. 그러나 툇문은 꿈쩍하지 않았고 바람은 부재중이었다. 강당 뒤로는 계단으로 길을 내었다. 계단이 끝나는 높은 곳에 태극문양이 그려진 신문(神門)이 보였다. 문 잠금 쇠는 허술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열수 있었다.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길손이 함부로 걸림 쇠를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문을 돌아가면 기와를 얹은 흙담이 있었다. 흙담은 키가 작았다. 담 너머를 보기위한 까치발이 필요 없었다. 또한 일부가 허물어져 안과 밖 구분도 없었다. 사우는 일반적인 형식의 세 칸 규모로 세워졌다. 곱게 오방색으로 치장을 했다. 화려하지 않고 간결한 단청이었다. 퇴색 또한 심하지 않으니 아직 누군가의 손길이 머물고 있다는 증표였다. 정산서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나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담한 마루가 있고, 키 작은 흙담이 있고, 질경이가 있고······, 배롱나무가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어색하지 않았다. 모두 있을 곳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듯했다. 오래전 내가 살았던 고향집 풍경처럼······. 그것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정산서원에 가면 중당 마루에 고요가 앉아 있을 것이다. 기와지붕에는 와송이 자라고, 마당에는 질경이가 하얀 꽃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배롱나무가 꽃잎을 붉게 태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