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시에 잠이 깼다. 나이가 드니 한밤에 깨는 일이 잦다. 전날이 휴일이라 TV를 보다 소파에서 초저녁잠도 잤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침대에 눕기는 했지만 한 밤중 이런 시간에 잠이 깨면 곤란하다. 다시 잠을 청해보는데 엎치락뒤치락 잠이 오지 않는다. 내가 잠을 설치면 아침에 출근해야하는 아내도 잠을 못 자게 될 것 같아 거실 소파로 나와 얇은 담요하나 덮고 다시 잠을 청해 보는데 여전히 말똥말똥하다.
밤잠을 설칠 때 나는 나름의 비책이 있다. 내가 자주 쓰는 비책은 책을 보는 것이다. 책도 가능하면 두꺼운 소설, 노벨상같은 수상작이면 더 효과가 있다. 소파에 기대어 작정하고 책을 펼치면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쓰러져 코를 골게 된다. 만일 이 방법이 효과가 없으면 책을 던지고 바둑 TV를 켠다. 한 밤이라 가족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소리를 소거하고 누워서 고수들의 대국을 보면 잠들려는 노력없이도 쉽게 잠에 빠지게 된다. 나는 바둑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마추어 하수다. 입신의 경지에 든 프로 고수들은 한 수를 두는데 길게는 십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내가 혜량할 수없는 그 난해한 한 수를 기다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드는 것이다.
근데 오늘 새벽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더 빠른 효과를 기대하며 새롭고 창의적인 방법을 시도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두꺼운 소설책이나 고수의 바둑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을 듣다 자연스럽게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원리는 책이나 바둑이나 음악이나 같을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 올댓클래식이라는 음악밴드에서 고성능 해드폰을 하나 선물 받았는데 기념으로 이 해드폰을 한번 활용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금방 잠이 들것을 확신하며 스맛폰에 라벨도 아직 떼지 않은 새 해드폰을 연결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잠이 가장 잘 올 것 같은 말러의 교향곡5번을 선곡했다.
말러는 9개의 불후의 교향곡을 만들었다. 내가 고딩때 말러의 1번 교향곡을 들고 사십년이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1번만 즐겨 듣고 다른 번호는 잘 알려진 선율만 기억하는 정도다. 그래서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말러의 교향곡은 1번 교향곡과 1번외 교향곡 두 가지로 분류된다. 그러니까 나의 음악 수준은 바둑으로 치면 아마추어 하수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5번 교향곡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고 기대와 달리 나는 잠들기에 실패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새벽에는 그 5번이 기대를 저버리고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뭐 이런 일은 있을 수 있다. 수면용으로 고른 소설이 너무 재밌는 바람에 밤을 새운 적이 가끔 있기에 나는 크게 당황하지는 않고 그냥 음악을 받아들였다. 마치 내가 깊은 밤에 잠을 깬 것이 그 음악을 만나기 위해서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사실 두 번째 악장이 끝날 때까지는 이러다 잠의 여신을 만나게 되겠지 하는 기대는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악장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유명한 왈츠를 연상시키는 선율을 들으면서 정신은 오히려 맑아졌고 기분도 좋아졌다. 널리 알려진 4악장 아다지에토를 들으면서는 삼십년 전 아내와 같이 지리산 정상에서 벌벌 떨면서 일출을 기다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참 신기한 일이다. 왜 연애시절 그 때가 떠올랐을까? 이야기가 엉뚱한 대로 빠지는데, 현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이 한 밤중에 삼십년 전 가슴 설레던 그 때를 소환하니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이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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