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찬 기운을 품고 있어 아직은 이른 봄인가 싶도록 갑작스런 바람들의 춤사위가 사납다. 제법 드센 바람에도 푸르름의 청명한 하늘빛은 농부들의 손길을 돕느라 연이틀 점잖게 내려준 단비들의 채색인가보다. 지난 2월에 새로 확정되었다는 동학농민혁명의 기념일 5월 11일이 지났다. 녹두꽃이라는 타이틀로 동학혁명을 그린 서사적 주말드라마가 TV에서 방영되고 있다. 125년 전 오늘같이 청명했을 푸른 하늘빛 아래 제법 드센 바람결도 따스하게 등을 덮여주던 봄햇살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 전남의 고부와 정읍을 비롯한 한반도 곳곳에서 민중들이 하늘마음을 세상에 알리고 하늘같은 품성으로 하늘빛 가득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 몸으로 일어났던 그 날에도 오늘 같이 푸름이 가득 찬 하늘이었겠다. 당시 동학에 참가했던 민초들의 수가 당해 인구 중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물결이었다고 한다. 수세기 동안 한반도 백성들의 생명 활동들을 유린했었던 지방관을 비롯한 봉건세력들에 항거하는 민란들은 이미 간헐적으로 산발적으로 역사의 페이지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그 이전의 민란들과는 달리, 1894년 전봉준 장군에 의한 의병 전투를 시발로 하여 동학의 활동은 이전 민란들과는 달리 ‘혁명’이라 역사학자들이 정의하고 있다. 부정한 수탈행위와 부패한 녹봉들의 봉건적 패악을 척결하고자 분기했던 다른 민란들과는 달리 동학에는 ‘인내천’, ‘시천주’, ‘사인여천’ 의 정신이 그 뿌리에 있었다. 더구나, 그 정신은 지식인적 학풍이나 사상철학의 논리와 이념에 기반함이 아니었다. 당시 지방관들의 가혹한 수탈에 의해 지극히도 피폐한 생명을 연명하느라 생존을 위한 생산 활동에 손발이 묶인 농민들의 삶, 그 가난하고 구차한 진흙더미에서 연꽃처럼 구현된 하늘마음(하늘과 맞닿은 마음)이 그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 하늘마음은 이웃 간에서 가족 안에서 범인의 내면과 일상 안에서 실천하는 정신의지였고 하늘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개혁의지로 작용했기에 가히 혁명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동학 혁명의 참정신이 결코 칼과 총과 죽창으로 관군과 대치해야 했던, 대치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질곡의 현장, 황토현 전투와 같은 혈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 풀 한포기, 구르는 돌멩이 하나에서부터 세상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하늘님이 계시니 어찌 공경하고 모시지 않을 것인가’하고 마음을 여미고 행동을 여미는 사람다운 양심을 실천하셨던 동학 민중들의 정신이야 말로 인류 문명사에서 그 유례가 몇 안 되는 진짜 혁명이었다 말하고 싶다.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자유주의 혁명이 서구 민중봉기에 의한 위대한 유산이라고 한다면, 우리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1894년의 사인여천 혁명은 우리 한반도가 인류 문명에 전달한 위대한 유산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 데에서 모두다 심열성복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道人)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서 모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홍종식,「70년 사상의 최대활극 동학란실화」,『신인간』 34호, 1929년 4월호) 여기 동학의 정신이 지향했던 이상과 실천을 엿볼 수 있는 실화적 증언을 발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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