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진학은 생각도 못했다.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일찍이 기술을 배웠다” “우리 때는 거의 다 그랬어. 부잣집이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냈지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했는데 중학교를 어떻게 다녔겠어. 꿈도 못 꿨지...” 함양읍 용평길 31-17 함양오토바이 김종수(59) 대표는 열네살 어린나이에 오토바이 수리기술을 배워 평생 오토바이와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수동면 효리마을에서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1974년 함양읍에 있던 한 오토바이수리센터에서 보조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일터를 잡았다. 열심히 잔심부름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익혔다. 기술자가 아닌 보조원이었기에 월급은 받지 못했다. 오토바이수리센터에서는 단지 점심과 저녁 식사만 제공했다. 김 대표는 “그 시절엔 기술자가 되기 전까지는 월급이란 게 없었다. 오토바이센터뿐 아니라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몇 년씩 돈 한푼 못받고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면서 “하도 못 먹고 살던 때라 하루 두끼 해결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고 했다. 효리마을에서 수동면 소재지까지는 십리(4㎞), 거기서 또 십오리(6㎞)를 더 가야 함양읍 오토바이센터까지 출근할 수 있었다. 중고 자전거로 매일 20㎞를 출퇴근 했다. “그때는 도로도 비포장 도로였고 자전거도 고물이라 지금처럼 씽씽 달릴 수도 없었다”며 “새벽 5시에 출발해야 7시나 8시쯤 함양읍에 겨우 도착했다”고 회상했다. 기술을 배우면서 한 고생보다 출퇴근 길 고생이 더 심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은 몇 배 더 힘들었다. “수동보다 지곡 쪽으로 다니는 게 훨씬 가깝지 않느냐”고 묻자 “그 당시는 지곡으로 가는 다리가 없었다. 함양읍으로 가는 길은 수동다리(사근교) 하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기술자들을 보조해 5년 동안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혼자서도 어느 정도 오토바이를 고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부산 영도오토바이센터에 반기술자로 취직했다. 그러나 이내 한계에 부딪혔다. 함양에서는 보지도 못한 250cc짜리 오토바이 수리가 들어왔다. 김 대표는 “어떻게 뜯기는 했는데 막상 조립을 하려니 앞이 캄캄했다. 몇 번을 시도해 봤지만 원래대로 조립할 수가 없어 사장님께 못하겠다”며 이실직고 하고 기술을 더 배우기 위해 퇴사했다. 부산역 근처 초량에 있는 더 큰 오토바이수리센터를 찾아 기술을 익혔다. 꼬박 3년을 더 배웠다. 그때부터 완전한 기술자 대우를 받으며 10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돈도 제법 벌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수동에서 오토바이수리센터를 개업했다. 생각보다 일이 많지 않아 유림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양읍으로 다시 센터를 옮겼다. 지금의 함양오토바이 맞은편에 있던 가게를 넘겨 받아 오토바이센터를 열었다. 1990년대 초중반이다. 그때부터 오토바이가 없어서 못 팔정도로 불티나게 팔렸다. 하루에 5~6대가 팔리는 날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두 대 팔기도 어렵다고 한다. 오토바이를 탔던 세대가 고령화되고 자가용 승용차가 대중화 되면서 오토바이 수요는 크게 줄었다. 김 대표는 “지난 27년 동안 함께 해온 처남에게 조만간 센터를 물려줄 생각이다”고 했다. “나한테 기술을 배웠지만 처남이 오토바이를 더 잘 고친다. 못 고치는 게 없다”며 청출어람이라고 추켜세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오토바이 수리기술을 배워 평생을 달려온 김종수씨.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누구에 대한 원망도 후회도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남편을 여의고 홀로 옹기장사를 하며 5남매를 길러주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어머니도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셨지만 오토바이센터 한쪽 벽면 사진 속에는 막내아들 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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