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노랗고 조그맣게 온다. 상림의 봄숲은 아래에서부터 화들짝 놀라듯이 깨어난다. 낙엽활엽수로 이루어진 숲이라서 그렇다. 상림의 봄숲에는 아래까지 햇빛이 쨍쨍 들어온다. 봄꽃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이때 풀꽃들은 재빠르게 자라나 반짝 꽃을 피운다. 이른 봄의 풀꽃들은 키가 10~20cm로 작은 편이다. 꽃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시간이 짧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꽃을 피우고 나면 서둘러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땅속뿌리에 영양분을 채운다. 이제 숲은 짙을 대로 짙어 있다. 햇빛을 바라보는 것이 그림의 떡이 되었다. 잎과 줄기를 거두어들인 채 다음 해를 기다려야 한다. 봄숲의 풀꽃은 서둘러 깨어나고 서둘러 잠자리에 든다. 이 풀꽃들은 숲 아래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이 작고 가녀린 풀꽃마저도 자신의 삶은 스스로 개척한다. 저마다의 개성을 활짝 드러내며 어여삐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상림의 봄숲에는 어떤 꽃이 피어날까? 하나하나 살펴보자. 봄꽃을 보려면 기본적으로 허리를 숙여야 한다. 현호색은 봄숲의 보석처럼 피어난다. 겨울의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열어준다. 길다란 통꽃에 꿀주머니를 달고 호호 입술로 벌을 맞는다. 현호색처럼 좌우대칭을 한 꽃들은 꽃가루받이 확률이 늘어난다. 쑥부쟁이처럼 방사대칭의 꽃보다 한 수 높다. DNA의 다양성이 가져다 준 진화의 결과이다. 상림 숲에서 볼 수 있는 현호색의 잎모양은 다양하다. 서로 다른 느낌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산자고는 가녀린 잎새 하나에 외대의 꽃줄기를 뽑아 올린다. 밝고 청초한 꽃을 마주하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피어나는 꽃잎의 바깥쪽을 보면 짙은 자주색 줄무늬가 섬세하게 가지런하다. 여섯 장의 하얀 꽃잎 안쪽에는 노랑초록의 무늬가 돋보인다. 이 아름다운 디자인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곤충을 부르는 뭔가가 있다. 바로 꿀이다. 숲에서 이 꿀을 찾아온 개미를 본 적이 있다. 산자고의 가녀린 꽃줄기는 비스듬히 드러눕는다. 개미가 쉽게 찾아오도록 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꿩의바람꽃은 상림 숲에서 귀하게 대접해야 할 풀꽃이다. 마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다. 자연식생이 잘 어우러진 곳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상림에서도 아주 조금 자라고 있을 뿐이다. 그마저 어긋난 관리에 수난을 당하고 있다. 꿩의바람꽃은 생김새도 고고하고 도도하다. 하나의 꽃대에 한 송이의 꽃을 피워낸다. 너무 고고해서 까칠하고 외로운 느낌이 들 정도이다. 꿩의바람꽃이나 연복초는 새순이 나올 때는 흙빛을 하고 있다. 흙빛 색깔은 어린잎을 지키기 위한 보호색이다. 점점 자라면서 밝은 녹색이 된다. 잎이 포개어질 정도로 촘촘하게 땅을 덮는다. 작고 가녀린 것들은 서로 뭉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안다. 힘없는 초식동물이 떼를 지어 모여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별꽃은 봄숲을 환하게 밝혀준다. 하얀 꽃송이가 숲 여기저기서 소담소담 피어난다. 5월 말의 숲에서 개별꽃이 씨앗을 토해 내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 숭고하게 보였다. 한껏 넓어진 잎 위에 힘없이 드러누운 까투리에서 까만 씨가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이 마치 저 태어난 고향 언덕으로 머리를 두는 여우의 모습 같이 느껴졌다. 꽃이 지고 5월이 되면 잎이 무척 커진다. 이미 햇볕이 부족해진 숲속에서 광합성을 더 많이 하려는 속셈이다. 꽃에 집중했던 영양분을 이제 뿌리줄기로 보내야 한다. 다음 해를 위한 준비이다. 생명의 순환에는 한 치도 어김이 없다. 염주괴불주머니는 숲 가장자리에서 주로 볼 수 있다. 괴불주머니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상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로 염주괴불주머니이다. 열매를 보면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열매 꼬투리가 염주처럼 올록볼록 늘어져 있다. 염주괴불주머니는 앞에서 본 풀꽃과 조금 다른 생육특성을 갖고 있다. 이른 봄에 잎을 내지만 상당히 오래도록 잎을 키워낸다. 숲가장자리에서 자라 햇볕을 좀 더 많이 받아서 그럴 수도 있다.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다시 햇잎이 올라온다. 생명력이 강한 숲속의 풀꽃이다. 미나리냉이는 동쪽 산책로나 중앙 숲길을 걸으면 흔하게 볼 수 있다. 봄숲의 풀꽃 중에서는 염주괴불주머니와 함께 키가 큰 편이다. 훌쩍 자란 키에 작은 꽃들이 뭉쳐 달린다. 큰 꽃방망이를 이루면 곤충을 부르기가 쉬워진다. 4월 미나리냉이 꽃이 필 때쯤 큰흰줄나비를 볼 수 있다. 이 나비의 애벌레는 미나리냉이 같은 십자화과 식물의 잎을 먹고 자란다. 어른벌레가 되어서도 미나리냉이 꽃을 찾아온다. 어린 시절이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상림의 숲에서 볼 수 있는 봄꽃은 연복초, 들현호색, 큰애기나리, 애기나리, 왜제비꽃, 큰꽃으아리 등이 있다. 함양상림의 오랜 숲에는 거대한 나무 아래 많은 풀꽃이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상림의 숲은 아래·가운데·위의 복층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런 숲이라야 생물 다양성이 커진다. 자연식생의 숲은 언제나 이런 구조이다. 풀꽃은 생태환경을 이루는 바탕이다. 특히 함양상림 같은 마을숲에서 생물 다양성을 높이는 귀한 존재이다. 다른 마을숲은 거의 숲 아래가 텅 빈 단층구조이기 때문이다. 상림에 가시거든 허리 숙여 귀한 존재들에게 눈을 맞춰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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