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 여행기 ‘1250원의 행복’(22)    함양읍 원교마을(2018년 8월 현재)♧ 교산리 소재 ♧ 세대 : 335가구♧ 인구 : 944명(남444, 여500)♧ 주요농산물 : 고추, 깨, 고구마 등♧ 이장 : 홍달원 원교마을에는 어르신들의 놀이터 향교가 있다 1250원으로 떠나는 마을여행이 마지막 종착역에 다다랐다. 지리산함양고속에서 운행하는 농촌시골버스를 타고 백전면 대방마을을 시작으로 11개 읍면의 2개 마을을 돌고 돌아 마지막으로 닿은 곳이 바로 이곳 함양읍 원교마을이다. 함양읍에서 원교마을로 가는 버스노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교마을은 함양읍에서 멀지 않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함양 중심지인 동문네거리에서 출발하면 도보로 20분,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버스터미널에서 함양 동문네거리까지 온 다음 함양교육청을 지나 함양 성당 쪽으로 가야한다. 이후 함양중학교 사거리에서 한전함양지사의 골목으로 들어선다. 그렇게 원교길을 따라 가다보면 아파트와 함께 원교마을이 시작된다. 번화한 원교마을은 마을 회관을 중심으로 주변에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원교마을은 향교가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향교가 있어 생기마을이라고도 했다. 원교마을은 함양에서 꽤 오래된 마을중의 하나다. 함양향교가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덕곡 조승숙의 ‘명륜당기’를 바탕으로 태조 7년(1398)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함양향교가 들어서기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그 역사가 깊다.취재진이 방문했을 때 마을회관에는 형님, 아우하며 피붙이보다 가까이 지내는 마을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마을 일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나서주고 이장이 하는 일은 서로 도와주는 어르신들이다. 한 평생 이곳 원교마을에서 살아온 어르신들은 고향 이야기를 실타래 풀 듯 술술 풀어낸다. 옛날에는 놀이도 없었다. 돈도 없으니 놀 것도 없었다. 농사짓고 한가할 때 도랑에서 천렵을 하면 솥단지를 걸어놓고 어탕을 만들어 먹곤 했다.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어르신들에겐 그 때가 행복한 순간이었다. 원교마을은 재해가 없이 안전한 마을로 전해져 온다. 홍수, 화재, 산사태 같은 위험이 없었다. 함양상림이 조성되기 전 위천이 범람하면 모두 원교마을로 피난을 왔다. 80여 세월을 살아와 기억이 희미하다고는 하지만 조각조각 옛시절을 떠올리는 신용록(82) 어르신의 설명에 취재진은 귀가 쫑긋해진다.함양향교가 있던 번화가원교마을은 향교가 있었기에 마을이 빠르게 발전했다. 향교가 있었기에 이 마을은 지금의 서울명동이나 대학로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향교에서 공부하고 집으로 향하는 양반자제들이 들렀던 주막도 즐비했으며 문물을 깨친 사람들이 몰려드는 번화가였다. 특히 어르신들은 이 마을에 연초조합이 있었던 시절 담배 매상을 하러 오면 5일정도 머물러야 하니 주막이나 하숙집도 성행했다고 기억했다. 성당이 있던 마을원교마을이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빈 이유 중의 하나는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 마산교구 함양성당은 1909년 대맛공소로 출발하여 향교소유 서당을 매수하여 공소로 사용해 오다가 1913년 4월26일 함양성당으로 승격되었다. 신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지금의 위치에 성당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그렇다보니 원교마을 주민들은 천주교신자가 많다.어려웠던 시절 천주교를 통해 구호물자가 들어오니 사람들은 원교마을로 몰려들었다. 신용록 어르신은 “신협도 천주교 신부님이 만들었다. 이 마을에서 창립해 3여년 있다가 읍으로 갔지. 비가 올 때 같이 쓰는 우산이 신협의 모토다. 없는 사람이 돈을 모아 필요할 때 쓰자는 것이다”고 전했다. 또한 “지금의 상조회사에서 하는 일을 천주교에서 해 주었지. 장례비가 없는 가난한 사람이 죽으면 천주교에서 일일이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래서 천주교가 더 번창했다”고 밝혔다.원교마을에는 전기도 제일 먼저 들어왔다. 다른 마을은 호롱불을 켰지만 이 마을은 천주교 신자였던 청장이 방문하여 전기를 직접 놔 줬다고 기억했다.어르신들의 놀이터 함양향교함양향교는 1398년(태조 7)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측되며 그 뒤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선조 36)에 건물을 중건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각 6칸의 대성전 및 동무·서무, 7칸의 명륜당, 각 5칸의 동재와 서재, 내삼문, 4칸의 전사청, 제기고, 고직사(庫直舍), 전직사, 태극루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정종상(72) 어르신은 “어린시절 향교는 우리에게 놀이터였다. 서당공부도 하던 곳이라 직접 와보니 옛추억이 떠오른다”며 “이곳 향교가 명당자리다. 명륜당에서 바라보면 지리산부터 필봉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날 것이다”고 했다.홍달원(67)이장은 “이곳 향교터를 설명하자면 향교는 용의 머리고 양쪽 두 곳의 우물은 용의 눈, 다른 큰 우물이 용의 입을 가리킨다”며 “이것을 스토리텔링 하여 마을사업을 승인받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고 밝혔다.향교 앞에는 홍살문이 있다. 옛 조상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도 말에서 내려 옷매무새를 다듬고 예를 갖추었던 비석거리에서 여러번 자리를 옮겨 지금 향교 앞에 있다. 필봉산이 왜 필봉산인가필봉산은 붓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필봉산 모습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함양향교 명륜당에 올라야 한다. 어르신들은 양반들이 공부하다 아마도 쉬는 시간에 바라본 산이 붓을 닮았다 하여 필봉산이라 이름 지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붓을 닮은 필봉산은 이미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명륜당에서 바라본 필봉산은 또 다른 풍경을 자아냈다. 소나무로 이뤄진 작은 숲, 당산원교마을 가운데에 당산이 있다. 제를 지내는 당산목도 있지만 여기는 윗당산, 아랫당산이 있었으며 윗당산 나무는 없어지고 아랫당산 나무만 크게 자랐다. 아랫당산 소나무 밑이 옛 성당 터였다. 정종상 어르신은 “당산은 왜 당산이냐, 집 당자를 써서 원교마을을 수호하는 신이 있는 곳이라 하여 당산이다. 이곳은 그냥 산이 아니다”며 높이 솟은 소나무를 만지며 설명했다. 어린시절 형님들은 당산에 소를 묶어놓고 놀다가 오후 3~4시가 되면 소를 먹이러 갔다. 소를 먹이고 풀을 베 오면 하루해가 저물었다.원교마을 사람들원교마을 사람들은 향교의 토지를 소작하며 살아왔다. 논농사는 거의 없었으며 주로 밭농사를 지었다. 향교 땅에 고구마를 심고 그것을 주식으로 먹고 살았다며 어르신들은 기억을 되새겼다. 없는 살림에도 음식을 하면 마을 사람들을 소리해서 함께 먹고 제사를 지내고 나면 이웃과 나눠먹었다. 그랬던 원교마을은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고 새로 집을 짓고 들어 온 이웃들이 많다. 예부터 원교마을은 집터로 최고명당 자리로 꼽히니 새 식구가 느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함양읍에 있으나 너무 번잡하지 않고 공기도 좋고 필봉산으로 산책가기도 적당한 거리에, 걸어서 읍에 나가기도 편리하니 주택지로 인기가 높다. 세종왕자 한남군묘마을에서 필봉산 산책로 쪽으로 고개만 넘으면 한남군묘에 갈 수 있다. 이 마을을 한남군이 묻힌 골이라 하여 한남골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세종의 12번째 아들로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 돼 세조2년에 휴천면 한남마을 새우섬에 유배됐다. 유배된 지 4년만에 생을 마감해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와 1557년(명종12)에 무덤이 조성됐다. 상림쪽을 향해 있는 한남군묘는 어르신들이 어린 시절 수시로 드나들던 놀이터였다. 어르신들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일본군들이 장난삼아 비석을 향해 총을 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총알 자국은 아직도 비석에 남아있었다. 어르신들은 마을 소개를 위해 직접 한남군묘까지 함께 동행했다. 원교마을 가이드를 자처한 어르신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마을입구에서부터 끝자락까지 어린 시절 기억에서부터 지금 살이가는 모습까지 그들의 인생이 역사가 되어 설명으로 덧붙여졌다.<연재끝> 정세윤·박민국·하회영·유혜진·차혜진 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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