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 여행기 ‘1250원의 행복’  함양읍 웅곡마을(2018년 8월 현재)♧ 웅곡리 소재 ♧ 세대 : 90가구♧ 인구 : 190명(남98, 여92)♧ 농가 : 45가구♧ 주요농산물 : 벼, 깨, 사과, 단감 등 마을 지형이 곰의 모양과 닮아 붙여진 이름 ‘곰실’ 함양읍 웅곡마을 시골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1250원의 행복’이 함양군의 10개 면 마을을 돌아서 중심지 함양읍의 마을을 소개할 차례이다. 함양읍에 속하지만 읍소재지에서 6km정도 떨어져 있는 단일 마을인 곰실(웅곡)마을을 찾았다. 함양지리산고속의 농어촌버스를 타고 곰실마을로 가려면 곰실이 종점인 버스를 타야 한다. 함양읍에서 출발하면 20분 정도 소요된다. 하늘에서 본 마을 지형이 곰의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곰실마을은 옛날에 호랑이와 곰도 이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 호랑이를 잡은 골짜기를 범장골이라 불리며 곰을 한자로 나타내는 웅(熊)자를 써서 행정상으로 ‘웅곡마을’이라고도 불린다. 곰실마을은 서리산을 중심으로 실자가 붙은 5개 마을 오실(곰실, 닥실, 거리실, 사리실, 자내실) 중 하나로 임진왜란, 6.25사변 등의 나라에 어려운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피난 와 인명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마을이다. 버스정류장에 내려 웅곡교 방향으로 보면 큰 나무 밑에 마을 어르신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주변에 다른 마을이 없어 주민들끼리 화합이 잘된다. 특별한 날도 아니지만 어머니들은 팥떡을 만들어 먹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쉬고 있었다. 마을은 주변이 높은 경사와 큰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산사태는 물론, 돌멩이 하나도 내려 온 적 없는 안전한 마을이라고 한다. 곰실마을의 다양한 바위 전설과 어르신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나보자!마을 형성에 대한 이야기 정자나무 밑에 있는 어르신들 중, 노란 모자를 쓰고 있는 박상도(79)어르신은 마을이 처음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주겠다며 “옛날 우리 할아버지한테 들었고 할아버지는 그 할아버지한테 들었으니 사실인지는 모르나 살아있는 증인의 이야기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숲이 우거지고 험한 계곡이 있어 사람이 살지 않는 동네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에 한 부부가 들어오게 됐다. 그 부부는 아마 수배를 당하는 사람들이었고 이 골짜기 마을까지 숨어들어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제일 처음 터를 잡은 곳이라 해 지금도 그곳을 ‘본터’라고 불린다. 부부가 정착하려고 하자 뒷산에는 45도 이상 경사가 져 있는 큰 바위들이 있고 가시나무가 우거져 재해와 짐승의 피해 등이 무서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나가던 노승(늙은 승려)을 만나 물었다. 부부는 “여기서 터를 잡고 계속 살고 싶은데 산사태 재해나 산짐승 등이 무섭다.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자 노승이 “앞으로 천년은 더 이 마을에 살아도 무너질 일은 전혀 없다. 아무 걱정 말고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저 산 봉우리에서는 매년 제를 지내십시오”라고 말해 그 뒤부터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왔다.  당산제 이야기 당산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진다. 부부는 당산제를 지내러 마을 뒷산에 올라갔더니 호랑이와 곰이 사람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당산에 제사 음식을 두려고 다가가니 곰은 다시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다음 해부터 제를 지낼 때는 곰과 호랑이의 먹이를 꼭 챙겨 갔다고 한다. 제를 지낼 음식 따로, 곰과 호랑이 먹이를 챙겨 가니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은 자신의 먹이를 주는 고마운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설도 있다. 박상도 어르신은 “호랑이 밥 준 거 빼먹으면 안 돼! 그게 조상들의 지혜야”라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노승의 말이 맞으면 이 이야기가 4~500년 이상 내려오는 이야기 인데 앞으로 500년은 이 마을이 더 안전하다는 말이다.”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김길영(71)씨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당산제를 맡아서 지냈었다”라며 마을의 당산을 지낸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 때는 당산제 지내는 사람으로 정해지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 음력섣달 그믐날 새벽 1시에 매년 제를 지냈다”면서 “부모님은 짐승이 나타날까봐 무서워했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오봉산(서리산)웅곡마을 뒤편으로 오봉산이 보인다. 항상 서리가 내린다고 해서 서리산, 또는 상산이라고 불렀으며, 남원시 등지에서 보면 봉우리가 5개라고 하여 오봉산이라 불러졌다. 따라서 오봉산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마을 사람들은 서리산이라 부른다. 오봉산은 고려말 이성계장군이 황산벌 대첩에 앞서 정병 5천을 매복시켜 왜구를 대파한 곳으로 바위 능선 중간에 장군대좌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옛날에 가뭄이 심할 때는 주민들과 함양의 유지들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전북도계에는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던 경상남도 기념물 제172호인 팔령산성(해발551m)이 있다. 함양의 옛 이름인 천령이 이 산의 한 봉우리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웅곡리나 죽곡리, 구룡리 방향으로 등산코스가 있다.박주한(69)씨는 “함양에 지리산은 유명한데 서리산에 대한 홍보가 약한 것 같다. 서리산에 대한 이야기가 더 조사되고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마을 바위 이야기 인천에 있는 여자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퇴직하고 고향인 웅곡마을로 돌아 온지 10년이 넘은 박주한(69)씨는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이날 마을을 알리기 위해 마을에 관한 자료를 미리 준비하고 노상업(67) 창조마을 위원장과 함께 마을의 바위 곳곳을 취재진에게 안내했다. 마을 곳곳에는 바위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 관리가 잘 안되어 풀숲에 가리거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바위가 많았다. 슬픈 사랑의 고동바위 전설 웅곡마을에는 고동처럼 생긴 시커먼 바위가 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고동(다슬기)같이 바위에 동굴이 있는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고동바위라고 부른다. 이 고동바위는 날씨가 궂고 비가 올 때가 되면 처량한 소리로 울음소리가 나 엄청 무서웠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과 같이 큰 마을이 형성되기 전 이 곳에는 곱사등인 남편과 벙어리인 부인 부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서로 불편한 몸이었지만 금슬 좋게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비탈에서 미끄러져 허리를 심하게 다치게 되었다. 부인은 정성을 다해 남편을 간호했지만 병은 더 악화 되었고 입맛이 떨어져 음식을 변변히 먹지 못했다. 남편은 한날 고동국(다슬기)이 먹고 싶다고 했고 부인은 한겨울 날 남편을 위해 십리나 떨어진 함양 위천수로 고동을 잡으러 내려갔다가 다음날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 소식을 들은 남편은 자신의 죄책감으로 하늘이 무너지도록 울면서 부인이 한 겨울 내 찾았던 빈 고동껍질을 함께 묻어 주었다. 그러더니 부인의 무덤 곁에 고동같이 생긴 시꺼먼 바위가 생겨났다고 한다.  용이 머무는 곳, 용소&식기소 마을에 물이 깊은 계곡이 흐른다. 그 곳은 용이 살았다는 전설로 용소라 불린다. 그 옆에는 작은 웅덩이가 하나 더 있는데 용이 밥을 먹는 식기라고 해 식기소라고 부른다. 용은 이 계곡에서 몸을 담그고 돌 위에서 따뜻하게 누어 노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고 나니 그 웅덩이가 너무 깊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어렸을 적 학교를 다니면서 그 용소를 지나다녔는데 그 깊은 웅덩이에 매일 돌 하나씩을 던졌다고 한다. 그 당시 마을에서 학교를 다니는 수 십명의 학생들이 매일 돌을 던지자 깊었던 용소의 바닥에 돌이 쌓여 깊이가 낮아졌다는 설을 전해주었다. “그럼 어르신들은 돌하나씩 던져보셨어요?”라고 취재진이 묻자 어르신들 모두 “당연히 많이 던졌지”라고 대답했다. 삿갓바위 마을 과수원 안에 있는 바위 모양이 삿갓처럼 생겨 삿갓바위라 불린다. 마을 회관에 모여있는 어머니들은 삿갓 바위에 공을 들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이가 생기길 원하는 어머니들은 삿갓바위에 새끼줄을 꼬아 솔잎, 고추, 숱 등을 꼽고 빌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과나무가 들어섰는데 그래서 그 사과나무 집 아저씨 이름이 종바우라고 불린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마을에는 여성의 주름치마처럼 생겼다는 치마바위, 서리산 위에 있는 깃대바위 등이 있다.   마을 회관 어머니 마을 회관에는 더운 날을 피해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마을 회관에 어르신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과거 시집살이, 남의집살이 등 어렵게 보내오고 자식들을 다 키워 지금은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때는 말도 못해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야”라며 “우리 마을에는 어렵고 가난할 때도 서로 베풀고 인심이 좋은 마을이다”고 말한다. 과거 한 집에서 제사나 행사를 지내면 마을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단자’풍습이 있었다. “단자 왔어요”라고 하면 큰 그릇에 묵, 콩나물 등 음식을 담아 주었다고 한다. 단자 이야기를 하자 너도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처음부터 마을 소개에 함께한 노상업 위원장은 “나도 옛날에 단자를 갔다 와서 얻어온 음식을 한참 먹고 있는데 그릇의 바닥이 보일쯤 밥 수건이 나왔다”면서 “나눠줄 것은 많이 없는데 양이 많이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도 했다”고 그때의 추억을 떠올렸다. 정세윤·박민국·하회영·유혜진·차혜진 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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