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 여행기 ‘1250원의 행복’ ⑳ 유림면 국계마을(2018년 8월 현재)♧ 국계리 소재 ♧ 세대 : 70가구♧ 인구 : 130명(남59, 여71)♧ 농가 : 48가구♧ 주요농산물 : 벼, 딸기 등♧ 이장 : 강신태 냇물이 굽개 돌아서 흐르는 국계마을 유림면 국계마을 시골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1250원의 행복’도 마지막 버스표를 사용해야 할 때가 왔다. 함양읍을 제외하고 버스를 타고 함양군 10개의 면을 돌고 돌아 마지막 유림면에 닿았다.유림면 여러마을 중 취재진의 발길을 붙잡은 마을은 국계마을이다. 국계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내리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잘 포장되어 있는 마을길이다. 마을은 전체적으로 비스듬한 오르막길을 따라 집과 개울과 논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햇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도록 잘 정돈된 국계마을은 시골마을이라기 보다 마치 전원 주택지를 연상케 한다.국계마을은 청송심씨가 최초로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의 토지가 지금의 산청까지 뻗쳐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예부터 부자동네임은 확실했다. 이곳은 옛날부터 잘사는 동네였기에 일찍 개화하고 문명을 빨리 받아들였다. 많은 토지를 가졌던 부농가에서 일찍 깨치고 마을을 발전시키다 보니 국계마을은 다른 곳보다 발전이 빨랐다. 국계마을은 대부분 쌀농사를 많이 짓는다. 국계마을의 황토쌀은 매우 유명하다.강신태(62세) 이장은 “정부 매상을 하면 우리동네 쌀을 제일 먼저 가져갔다. 창고세를 거두려면 쌀을 창고에 오래 저장해야 하는데 우리마을 쌀은 저장할 새도 없이 바쁘게 팔려갔다”고 전했다. 국계마을 자랑이라 하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강신태 이장은 마을사람들의 단합을 손꼽았다. “우리 마을에는 60~75세가 40여명 된다. 우리마을 청년회가 아마 가장 단합이 잘 될 것이다. 면에서 체육행사를 해도 우리 마을이 주축이 된다. 8월15일 면민의 날 행사에도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진행을 돕기도 한다”고 설명했다.화합이 잘 되니 귀농귀촌인과도 조화롭게 산다. 40대에 이곳 마을로 전입하면 마을에서 지원도 해 준다고 선전했다. 어떤 지원을 해주는지 묻자 일단 전입하고 오면 말해주시겠다 하니 국계마을로 이사 오는 게 먼저인 듯 하다.● 마을의 명칭 ‘국계’국계마을은 냇물이 굽게 돌아서 흐른다 하여 굽개 또는 국계, 제계, 혈계라고 하였다. 제계라는 마을 이름은 고려말 목은 이색 선생이 만년에 이 마을에서 우거할 때 서재를 짓고 이름을 제계서재라 하였다. 혈계는 사근산성에서 500여명의 고려군이 전멸할 때 창과 칼로 싸우며 피가 흘러 도랑을 따라 강물을 이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마을 이름이 제계에서 국계로 바뀐지는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행정구역 개편 때 바뀐 것으로 전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사투리로 깃끼라고도 불렀다.● 목은 이색선생이 수학하던 제계서재(蹄溪書齋)목은 이색선생은 고려 말 충절을 지켰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대사성, 판삼사사를 거쳐 한산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고려조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을 지냈다. 제계서재는 이색 선생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와서 우거할 때 최초로 지었다. 선생의 함양 은거설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기록이 없으나 여러 정황을 볼 때 신빙성이 있다. 이색의 사후 제계서재가 퇴락해서 성종때 사숙재 강희맹이 중수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언제 소멸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는 제계서재 각석만 남아있다. 유허지 각석에는 ‘제계서재 이목은 소축 강사숙재 중수지 을묘사월(蹄溪書齋李牧隱所築姜私淑齋重修址乙卯四月)’이라 새겨져 있고 글자가 풍화되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을묘년 사월이면 연산군 원년이기 때문에 강희맹의 사후 10여년 후에 강희맹의 후손이나 혹은 마을사람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돌에 새겨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이색 선생이 수학하며 지내던 이곳은 현재 그 터만 남아있다.● 개암 강익 선생과 남계서원이 마을에는 개암 강익 선생의 별묘가 있다.조선시대 인재배출의 보고였던 서원, 오늘날의 대학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서원 중 제일 처음 창건된 것은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죽계서원)이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것이 함양의 남계서원이다. 남계서원을 세운 이가 바로 개암 강익 선생이다. 개암 강익선생은 동국 18현이면서 조선조 5현의 한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건립했다. 강익 선생은 남계서원건립 추진위원장을 맡아 군수를 설득하여 지원금도 받고 학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10여년에 걸쳐 서원을 지었다. 강익 선생은 남계서원 초대원장을 지냈다. ● 국계마을의 역사학자 강문희 어르신 개암 강익선생의 별묘(가묘)를 찾아가서 만난 어르신이 강문희(76세) 어르신이다. 97세의 노모를 모시며 살고 있는 강문희 어르신은 손재주가 많아 보인다. 별묘를 모시고 있으니 함부로 이사를 갈수도 없다. 어르신은 오래된 집터에서 취미로 배운 서각을 하며 집안 곳곳에 손수 만들어놓은 다양한 물품들이 한가득이다.강익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며 함양 효우촌에서 출생했다. 남명 조식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49년(명종4년) 진사가 된 뒤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했다. 1552년에 남계서원을 건립하여 일두 정여창선생을 제향하고 후학을 지도해왔다. 강문희 어르신은 “개암 강익 선생은 나에겐 13대 선조이시다. 1523년 계미년생이다. 500여년 된 위폐를 모시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중앙정부에서 ‘선생’이란 칭호를 잘 주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선생이라 청할만큼 추천을 얻어야만 그 칭호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강익 선생의 별묘는 건물이 매우 오래되어 현재 보수신청을 해 둔 상태다. 낡아서 쓰러져 가고 있지만 보수를 못하고 있다. 면에 보수신청이 되어 있는 상태다. 1700여년 대 후기에 지어진 이 건물 또한 종손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 강익 선생의 제자와 선비들이 십시일반 뜻을 같이 하여 지은 것이다.매년 음력10월1일 기제와 설·추석 차례를 지내고 있다.● 아름다운 고향으로 귀향국계마을 어르신들에 따르면 이 마을에서 월남전에 참전했어도 전사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오면서도 전염병이 돌거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주민들도 없다. 그래서 국계마을을 사람들이 살기 좋은 마을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마을 안에 저수지가 3곳이나 있으니 농사짓기도 유용하다. 마을 안쪽에 있는 저수지에는 연꽃이 피어 마을풍경을 더욱 평온하게 꾸며준다. 그래서인지 국계마을에는 고향을 찾아 다시 돌아온 이들도 많다. 젊어서는 돈을 벌기 위해 객지에서 살았지만 퇴직을 하고, 현장 일을 멈춘 이들은 부모님의 땅, 자신의 고향으로 귀향해 와 노년을 즐기고 있다. ● 정무양 어르신마을에 도착하여 마을 안내를 받았을 때 강신태 이장님 외에 가이드를 자처했던 정무양(70) 어르신. 칠십대 어르신이 키가 너무 커서 위로 쳐다봐야 할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 형제가 그 시절 180미터가 넘는 키를 자랑했다고 하니 유전자의 위력이 대단하다. 큰 키와 운동신경이 발달했으니 정무양 어르신 집안에서 농구선수도 나왔다. 정무양 어르신의 여동생이 바로 정미라 전 여자농구대표팀 감독이다. 한국 최고의 가드로 코트의 발발이, 깐돌이란 별명으로 패스워크와 돌파력이 뛰어난 선수였다. ● 김병곤 제39회 함양군민상 수상자 제39회 함양군민상 지역사회개발 및 봉사부문 선정자인 김병곤 향우가 바로 국계마을 출신이다. 함양군민상을 수상한 김병곤 부천버스 대표의 고향사랑은 남다르다. 초등학교 졸업후 60여년 타향살이를 하지만 고향과 지역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해왔다. 특히 국계마을 회관이 소하천정비사업으로 편입돼 건립지 물색에 난항을 겪고 있을 때 주민들을 위해 지금의 마을회관 부지를 희사하고 상수도 원천부지 또한 희사하여 주민들의 쉼터를 마련해 주었다. 이 외에도 함양군장학회에 장학기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한 성금을, 자원봉사 지원 등 지속적인 후원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정세윤·박민국·하회영·유혜진·차혜진 기자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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