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걱정에 장교 임관 고사, 훈련소 조교로 신병 교육 “장교로 현지임관 했으면 별 두 개는 달았을 거야”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민족의 큰 생체기로 남은 6·25도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아흔을 넘긴 한 노병(老兵)에게는 아직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6·25 발발 68주년을 맞아 재향군인회 함양읍분회 양기영(91) 분회장을 찾아 6·25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봤다. 양 분회장은 지난 1928년 함양읍 두산마을에서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90평생을 함양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지난 2010년 6·25전쟁 참전 60주년을 기념해 호국영웅장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좌우 이념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절 그는 대한청년애국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양 분회장은 “인민군이 함양에 진입하기 전날밤 백암산에서 함양읍으로 인민군의 예광탄이 수없이 날아들었다”며 참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대한청년단 단원 10여명이 백연리 돌북 뒷산에 은신하며 교대근무를 섰다. 상황파악을 위해 읍사무소(당시 면사무소)와 경찰서에 계속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대원 중 한명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니 경찰서와 면사무소는 이미 피신하고 텅 비어 있었다. 대원들은 피난을 결정했고 휴천면 목현을 거쳐 유림으로 가는 산길을 잡아 이동을 시작했다. 문정에서 인민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공무원이나 경찰가족은 물론 아군에게 부역한 주민 등이 그 대상이었다. 그는 피난 중 운 좋게 후퇴하는 우리 국군의 지프를 만나 애국단 회원임을 밝히고 대원들과 지프에 매달려 진주를 향해 험준한 산길을 달렸다. 원지 다리목을 못가 낭떠러지에서 지프가 굴러떨어질 뻔했던 아찔한 일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주와 함안을 거쳐 헌병대가 주둔하고 있던 마산 중리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도착해 인근 10사단 방위사령부에 합류했다. 물론 민간인 신분이었다. 월튼 해리스 워커 중장이 사령관으로 있던 미8군에서 수색요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했다. 전쟁 중에도 비교적 넉넉한 미군의 보급품 덕에 배고픔의 설움은 잊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여전히 민간인 신분이어서 직접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군복과 개인화기 등을 지급받고 ‘군번 없는 용사’로 군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날 인천상륙작전 성공 소식이 전해졌고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에 나섰다. 며칠만에 고향 함양까지 진격했고 평소 그를 아끼던 이 중위는 양 분회장에게 현지임관을 권유했다. 계급도 이 중위와 같은 중위를 제안했다. 그러나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장교가 되는 길을 고사했다. 양 분회장은 “그때 이 중위의 현지임관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아마 별 두 개는 달았을 것이다”며 당시 자신의 결정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1951년 사병으로 제주 신병훈련소에 입대해 12주 훈련을 수료하고 그 곳에서 신병훈련 조교로 배치됐다. 제주 신병훈련소에서 4년 동안 근무한 뒤 논산훈련소로 옮겨 모두 5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장기하사로 전역했다. 비록 전쟁터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치르지 않았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또 신병을 양성하는 조교로 대한민국을 지킨 자부심과 애국심만큼은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 못지않다. 양 분회장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갈수록 약해 아쉽다”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라는 애국가 가사를 잘 되새겼으면 한다”는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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