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부터 <천리길> 晉州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함양행 버스를 탔다. 6·25가 끝난 수년 후까지도 공비 출몰이 빈번했던 함양·산청 가는 길은 곧 ‘골로(죽으러) 가는 길’로 통했는데……버스는 58km의 페이브먼트를 1시간 5분 만에 주파, 기자를 함양읍에 내려놓았다. 우선 버스터미널 옆 나그네다방으로 들어갔다.” 1987년 7월 <월간경향> 정순태 기자가 쓴, 소설의 한 장면 같은 인산 김일훈 선생 인터뷰 기사 도입부의 한 대목이다. 5공화국 말미,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선언의 열기에 더해 한여름의 폭염까지 뒤집어쓴 채 기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진주를 거쳐 함양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때는 서울에서 함양까지 내려오는 직행버스도 없던 시절이었다. 진주나 거창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었던 함양에 어느 날 갑자기 <지리산 도사>를 인터뷰한다며 기자들이 몰려들더니, 뒤를 이어 암·난치병 환자들이 줄지어 모여들기 시작했다. ‘좌안동 우함양이라’, 예로부터 안동 함양이 훌륭한 선비 정신의 고장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데, 다만 교통이 좀 불편했기에 오지로 인식되곤 했던 곳이 함양이었다. 지금이야 지리산의 대문격인 오도재 지리산제1문이 함양 품 안이요, 사통팔달(四通八達) 교통의 요지란 말이 함양의 자랑이 되어 있지만, 그땐 그랬다. 신문 잡지 기자들이 앞 다투어 <지리산 도사> 이야기를 기사로 썼고, 그 기사를 읽은 전국의 암·난치병 환자들이 함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밤 9시 뉴스에 매일 나오지 않는 이상, 어차피 서울 사람들이 읽고 보는 신문 잡지에 적힌 인산 이야기를 함양 사람들이 알 수는 없었다. 김일훈 할아버지를 만나 병을 고치고 새 생명을 얻고자 하는 외지인들이 부쩍 늘었고, 할아버지 집을 아는 택시 기사와 약재를 파는 읍내 건재상만 바빠졌다. 덩달아 함양도 바깥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기사를 접한 바깥사람들이 죽염을 찾기 시작했다. 김일훈 선생이 아들(김윤세 現 인산가 회장)과 함께 만들어내는 소량의 죽염을 가지고서는 쏟아지는 죽염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고심을 거듭하던 김윤세 회장이 함양군에서 죽염제조 허가를 받아 세계 최초로 죽염생산을 시작한 게 1987년 8월27일의 일이다. 정순태 기자가 ‘골로 가는 길’을 지나 생전의 인산 선생을 찾아간 지 두 달 뒤에 벌어진 일이니, 그로부터 올해가 꼭 30년 되는 해이다. 박후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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