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란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남녀가 그 부모를 떠나 각각 다른 삶을 살았던 둘이 하나의 몸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하는 남녀는 분명히 부모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하나의 몸을 이룰 수 없다. 결혼을 해서도 아직 부모의 정신적, 경제적, 상호적인 관계를 정리하여 떠나지 않으면 그 결혼은 불완전한 것이며 온전한 부부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 전에 홀로 있을 때 관계했던 모든 것을 정리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 부부는 한 몸을 이루어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둘이었던 그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방법이 바로 용서와 사랑으로 서로를 받고 섬기는 것이다. 용서란 끊임없는 심장의 운동처럼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리고 벌였던,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갖게 된 상처의 끈을 풀어주어 대신 사랑의 끈으로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는 위대한 일을 만들어 낸다.
용서란 한 번으로 되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내 안에서 자주 일어나야 하며 한 번으로 안 될 때에도 실망하지 말고 지속적인 용서를 해야만 한다. 어떻게 용서를 해야 할지 무엇을 용서해야 할지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가 안 될 때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통해서 용서를 배우며 행해야 한다.
또 하나는 상대방이 회개하여 손을 내밀 때 하는 용서가 있는데 그것도 귀하지만 최고의 용서는 상대방이 어떠한 상태이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이해하고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잘 되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용서이셨는데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는 의인들을 위해 그리고 값있는, 가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창녀, 악덕 수전노인 삭개오 등을 만날 때 사람들은 제자들은 못마땅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어찌 예수님 같은 고결하고 영웅적인 분이 하찮고 밑바닥에서 사는 그들 그래서 사람들의 손가락을 받으며 지탄의 대상인 그들과 만나주시고 사랑으로 대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성령을 받고 새사람이 되었을 때에 깨닫게 되었다.
바울이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돌이키며 이 글을 썼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용서는 나에게 와서 잘못을 뉘우치며 변상할 때 비로소 주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세상의 기준이요 그래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하며 미워하며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가 이렇게 차이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린 하나님의 용서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야 하며 가까운 배우자와 자녀에게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해야 한다.
이 시대에 회복되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경제도 회복되어야 하고 교육과 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잘못된 언행으로 서로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어 상하게 만들었던 그 죄를 멀리 떠나보내어 상대방이 자유롭고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용서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용서를 하시지만 우리들은 서로에 대해 용서를 주고받아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의심과 분노와 좌절과 절망의 뿌리는 내 안에 있는 상처로 말미암는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와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 대해서는 분노의 대상으로 매우 더럽고 불의와 세력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지혜와 정의로운 감정으로 불의한 세력과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사상이 그 사람을 투쟁의 사람으로 만들며 언제나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처럼 긴장하며
공격적인 삶을 살게 만든다. 이 어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바로 용서이다.
지금 이 나라가 남과 북 동과 서 좌와 우 모든 사상에서 서로 헐뜯고 싸우고 있다. 다양성이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하나 되는 노력이 아닌 서로 다르고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내 뜻 때로 따르지 않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며 그래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있다. 그냥 서로 상대방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자기 앞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용서의 논리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교만이다. 용서를 하지만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패전한 장군의 머리를 밟듯이 말이다.
용서는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였음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허물을 아무 이유 없이 받으시고 그를 용서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탕진하여 거지꼴로 돌아 온 아들을 자신 속에 넘치는 사랑으로 그를 끌어안고 우시는 분이 아버지이시다.
목사와 교인들이 그러한 관계가 되어야 하고 대통령과 국민들이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하며 스승과 제자가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 서로 아픔과 상처를 주었던 사람과 사건과 내 자신을 용서하고 그럴 때 넘치도록 임하는 사랑이 채워짐으로 이 둘이 하나 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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