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정한 지리산인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지리산인이라 칭하는 조종대씨. 지난 40년을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근무한 진정한 지리산인이 바로 조종대씨다.
“산에 가면 항상 마음이 넓어진다. 저 아래 동네에서 아웅다웅 살다 산 정상을 오르면 모든 것을 잊게 된다.” 산을 좋아해 평생을 산과 함께 일한 조종대씨는 지리산 구석구석에서 일했다. 세석, 장터목, 벽소령, 함양, 하동, 구례 뱀사골 등. 그는 책상에 앉아 일하는 체질이 아니라 직접 현장을 누비며 부대끼는 것을 즐겼다. “산에 가서 좋고, 사람을 만나서 좋고, 산에 가서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가장 좋다” 산 사나이 조종대씨의 산 사랑이다.
그가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77년이다. 그가 맡은 업무가 지리산 등 국립공원 관련 업무로 10년간 일하다 93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만들어지면서 자리를 옮기면서 산과 가까이 있기를 원했다. 2004년 퇴직 이후에도 그의 노하우가 반드시 필요해 7년간 국립공원 지킴이로서 활동하기까지 했다. 40년 평생을 산과 함께 생활한 것이다.
처음 들어간 국립공원관리사무소는 상당히 열악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사고가 나니까 쉴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는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조난자 구조였다. “시체를 수십 구 업고 산을 내려왔다. 조난당한 이들을 구조한 것은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지금처럼 119 구조대가 활동하던 시기도 아니어서 조난 등 사고를 당한 이들의 구조는 그의 몫이었다. “숨진 시체를 발견하고 유가족들이 올 때까지 며칠 밤을 지키기도 했었다. 유가족들이 도착하면 원망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우리의 임무니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맡겨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당시에는 전기도 없었고 전화도 없었다. 오로지 튼실한 몸 하나로 열심히 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립공원에 근무할 당시 그는 ‘지리산 다람쥐’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노고단에서 출발해 천왕봉 정상에서 다시 백무동으로 내려오는데 10시간 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를 보여주었다.
“산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땀 흘려 올라갈수록 힘이 샘솟는다. 흐르는 땀을 정상의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씻어준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산에 가면 모든 자연과 하나가 된다.” 그가 산에 오르는 이유다. 그는 또 “산은 오를 때 마다 모습이 변한다. 천왕봉 일출은 3대가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을 정도라는 말이 있다. 지리산 운해를 바라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지리산에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조종대씨는 그렇게 40년을 산과 함께 생활했으면서도 아직도 매주 산을 오른다. 요즘도 새벽 4시면 일어나 필봉산 능선을 탄다. 주말에는 지인들과 함께 함양의 고지들을 점령해 나간다. “함양에는 지리산을 포함해 1000m 이상 되는 고봉이 35개 정도 되는 것 같다. 가보지 않은 곳은 없다” 이제 일흔이 넘어 조금 힘에 부칠만도 하지만 아직도 튼실한 다리는 자연스럽게 산으로 향한다.
평생 산에서 산 사람이 또 산에 간다고 그의 아내가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래도 산이 부르면 혼자서 훌쩍 떠난다. “아내가 많이 챙긴다. 내조가 없었으면 내가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 조종대씨가 그렇게 자랑하는 그의 아내는 전영숙 여성팔각회장이다. 그가 산과 사랑에 빠진 사이 2남 1녀 자녀를 챙긴 것이 그의 아내다.
낙천적인 성격의 조종대씨. “순리대로 살아간다. 짜증도 내지 않고 근심 걱정도 없다. 걱정해서 짜증낸다고 안 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이 같은 그의 성격때문일까 그는 시인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산 잘 타고 술 잘 먹는 걸로만 아는데 글 쓰는 것 보고 놀란다” 월간 순수문학으로 등단한 그는 함양문인협회와 경남시인협회 회원이며 지리산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근무했던 일들과 지금까지 작업했던 시를 책으로 펴내는 것이 꿈으로 남아 있다.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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