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짱 문쌤: “친중결일연미반아라사” 얼짱 학생: 뭔 생뚱맞은 말씀이십니까? 얼짱 문쌤: 이 말씀이 뭔 말씀이냐? 하면, ‘친중국(親中國)하고 결일본(結日本)하며 연미국(聯美國)하여 반아라사(反亞羅紗)하라.’는 말씀이시다. 풀이하자면 중국하고는 친하게 지내고, 일본하고는 결속을 하고, 미국하고는 연대하고 러시아는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시다. 누가 이런 요상한 말씀을 하셨느냐고 물으신다면 황쭌셴(黃遵憲) 중국 외교관의 말씀이라 말하겠습니다. 황쭌셴은 누구냐? 하고 또 물으신다면 일본에 와서 활동하는 중국인 정치가라 이 말씀이올시다. 자,자, 《조선책략》이라는 책에 대해서 알아 둘 필요가 있어요. 1870년대 중반 이후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등을 중심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근대화하자는 개화파가 형성되고 등장하였지요.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본에 3개 항을 개방한 조선은 그해 5월 제1차 수신사로 김기수 팀을 파견한데, 이어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예조참의 김홍집 팀을 일본에 파견하였어요. 김홍집은 일본에 약 1개월간 머무는 동안 청국 공관을 왕래하면서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 참사관 황쭌셴 등과 외교정책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귀국하는 길에 황쭌셴이 지은 《사의조선책략 私擬朝鮮策略》을 얻어와 고종에게 바쳤어요. 즉 황쭌셴은 러시아가 이리처럼 탐욕하여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정벌에 힘써온 지 300여년 만에 드디어 조선까지 탐낸다고 하면서, 조선이 이를 방어하기 위한 책략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여 자체의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어요. 특히 러시아의 남침을 방어하기 위해서 미국과의 수교를 제시하였어요. 고종은 지당한 말이다 하여 조선책략 책자를 대신들에게 배포하고 미국과 수교를 하려고 하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위정척사파가 ‘아니 되옵니다!’하며 들고 일어났어요. 1881년 영남 유생 이만손과 강원도 유생 홍재학 등이 위정척사를 외치며 쇄국을 주장하고, 기독교를 맹렬히 공격했으며, 조선책략의 내용은 망언이 아닐 수 없다고 집단 상소를 올리며 결사항전으로 이어졌지요. 고종은 근대적 개화정책추진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근대문물과 기술 과학 교육 및 근대식 군대 등 선진 현황을 파악하고자 일본 수신사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김윤식을 단장으로 영선사(1882년)를 파견하여 천진기기창을 시찰하여 무기제조법과 군사훈련법을 배워오도록 했어요.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 한 후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 보빙사(1883년)를 파견하여 신식우편제도와 근대학교 육영공원 설립에 영향을 준 각종 문물을 배워오도록 하였지요. 고종은 무엇보다도 무기제작과 군대의 근대화가 시급하다 생각했어요. 1881년 5군영으로부터 80명을 선발하여 최초의 근대적 신식 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지요. 민영익이 최고 책임자가 되고 교관으로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 공사관 소속 공병소위 호리모토를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가르쳤어요. 고종이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별기군 교련을 감열하기까지 하였지요. 지금의 육군사관학교처럼 국방의 기둥으로 키우려했어요. 그러니 양반자제들로 뽑힌 별기군에 대한 대우는 그야말로 최상이었지요. 그러나 구식군인들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된 훈련에 죽을 맛이었는데 별기군은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하고 멋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최상의 대우를 받으니 열불 열뿔이 나지 않겠어요. 1882년 6월 구식군인들이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하던 차에 겨우 한달치 급료를 받았는데 그것마저 말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모래와 쭉정이가 반 넘어 섞여 있었지요. 신식군인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 격분한 구식군인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갔고 별기군 교관 호리모도도 살해했어요. 다음엔 일본 공사관 청수관에 달려가 불을 지르고 일본인들을 살해했어요. 이것이 임오군란이에요. 정치복원을 노리던 흥선 대원군이 뒤에서 암암리 조종하였지요. 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에 난입했지만 민비는 궁녀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어요.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에게 폭동을 수습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민비는 재빨리 청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하여 난을 진압했어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갔어요.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어요. 일본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서울에 일본인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왔어요. 이 임오군란으로 주도권을 잡은 청나라는 사사건건 조선의 정치에 감 놔라 배 놔라 내정간섭을 나날이 심하게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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