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을 타고 서구 열강들이 전 세계에 시장을 넘겨보고 통상을 요구하며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중국 청나라는 이미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무릎을 꿇고 1842년 난징조약을 맺어 홍콩을 넘겨주었다. 상하이를 포함 5개 항구를 개방해야 했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청나라에 몰려들었다. 중국 청나라는 난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과학과 선진문물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리홍장 등 양무파를 중심으로 총리아문이 주축이 되어 1861년부터 1894년까지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군사적 자강과 경제적 부강을 이루려는 목적이었다. 선진 과학 기술과 신식 무기제작을 비롯 여러 정책들과 사회적 개혁을 시작했지만 청이 내세운 기본 방향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었다. 이는 중국의 전통적 가치 체계는 그대로 두고 발달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내용은 바꾸지 않고 껍데기만 갈아 바꾸자는 뜻이었다. 이는 후에 청프,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의 양무운동의 개화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음을 뜻했다. 반면에 일본의 개화정책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성공을 거두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이 개항을 요구했고 함포사격에 굴복한 일본은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에 이어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모두 열어버렸다. 니혼징다찌: 우리 일본사람 니혼징다찌와 서양의 기술과 사상, 제도 등 모조리 받아들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낡은 일본제는 싹쓸이로 바꾸겠쓰므니이다. 일본사람이라는 생각까지도 바꾸겠쓰므니이다. 우리노 사람 서양사람과 똑같이 양복입고 콧수염 기르고 ‘디스 이즈 북크(This is book.) 뎃드 이즈 펜시루(That is pencil.)`하며 커피마시며 미국말 영국말 지껄이며 선진 서양문물이면 가리지 않고 배우겠쓰므니이다. 일본은 이른바 <문명개화론>을 외치며 메이지 유신을 이룩했다. 이로써 동양에서는 가장 빨리 근대화를 이룩했다. 국력을 키운 일본은 서구 열강에게 당한 자신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중국과 조선의 침략을 슬슬 넘보기 시작했다. 일본 정치 강경론자들에 의해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났다. 마침내 1875년 9월 조선의 해안선을 탐측한다며 일본 운요호(雲揚號)가 서해 앞바다를 거슬러 올라와 강화도에 나타났다. “불법으로 침입한 일본군함은 게 섰거라!”조선 수비병이 총을 쏘며 공격했다. “조센징이노 잘도 걸려드는 구나. 조선이 선제공격을 했으니 무차별 함포를 쏘아라!” 운요호는 막강한 화력으로 영종도에 무차별 포탄을 퍼부었다. 영종도는 초토화됐다. 1876년 2월 일본은 함포를 쏘아대며 개항을 강요했다. 미국에게서 배운 포함외교였다. 신식 군함을 대적할 수 없었던 조선은 할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규)를 강제로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도 미국도 아닌 일본에 의해 최초로 조선의 빗장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조용한 동방의 고요한 나라가 무력으로 열강에 의해 세상에 문을 열었다. 조선의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이 강화도 조약은 무력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일방적 불평등 조약임을 알아야 한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청이 조선에 대해 형식적으로나마 가지고 있던 종주권을 부정하고 자주국이라는 말로 돌려 지배권을 일본 쪽에 돌려놓으려는 속셈이다. 제4관: 조선국은 부산 외에 두 곳을 개항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가한다. → 경제적 목적으로 부산항, 정치적 목적으로 인천항, 군사적 목적으로 원산항 3곳의 개항을 요구했다. 제7관: 조선국은 일본국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차후 일제강점기 때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사전 준비이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각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에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일 때에는 모두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 조선에서 저지른 일본 범죄인을 일본이 담당한다는 대표적인 불평등 치외법권이다. 강화도 조약에 이은 부속 조약과 통상장정(조일수호조규 부록)에서는 일본 화폐 유통, 일본 상품에 대한 무관세,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으니 얼마나 불평등한 조약인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빗장이 풀리자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나라가 망했다고 전국의 유생들이 문호개방과 서양문물 수용을 반대하며 결사 항전에 돌입했다. 1860년대는 이항로, 기정진을 중심으로 통상반대운동, 1870년대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유인석 최익현을 중심으로 개항반대운동, 1880년대 <조선책략> 배포와 미국수교 체결 이후 위정척사파 이만손을 중심으로 영남만인소 사건이 일어나 개화반대를 외치며 조선이란 나라가 망했음을 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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