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인생여정은 파란만장하다. 영조의 현손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이다. 12세에 어머니가, 17세에 아버지가 죽자 친척이 거의 없이 먼 왕손 일가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안동 김씨 가문에 구걸도 서슴지 않는 상가집 개로 불리우며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 당시 안동 김씨는 정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왕족 중 똑똑한 인재가 있으면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귀양 보내고 죽이고 하여 자기들 입맛에 맞는 왕족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철종과 6촌 형제간이었던 흥선은 살아남기 위하여 ‘나는 개요.’하며 정승 벼슬아치가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다리 아래로 기어서 지나다니고 했다. “저런 저런, 천하의 천치 바보 같으니라고. 저것도 왕족이라고 잔칫집에는 빠지지 않고 나타나 밥 빌어먹고 사니 인생이 불쌍하여 그냥 내버려 둡시다.” 흥선은 살아남기 위하여 미친 짓 바보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가슴에 비수를 꽂고 있었다. “두고 보아라. 언제가 너희들은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벌벌 떨며 비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그는 앞날을 내다보고 왕궁 내의 최고 어른인 익종비 조대비에게 남몰래 충성을 다했다. 후계자 없이 승하할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그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추대해줄 것을 암암리 약조를 받고 있었다. 1863년 12월 초 철종이 사망하자, 신정왕후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 명복을 익성군으로 봉해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왕이 어리므로 자신이 수렴청정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점차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의 전권을 마침내 틀어쥐게 되었다. 상가집 개가 일약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 된 것이다. 대원군이 집권할 무렵 국내외 상황은 혼란의 시기였다. 계속된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봉기가 그치지 않았고 나라 기강은 문란했다. 대원군이 집권을 하자 제일 먼저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을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안동김씨가 노론과 함께 세도를 잡고 왕실과 국정을 떡 주무르듯이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당색과 문벌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였다. 주요정책을 결정하는 비변사를 폐지하고 삼정승이 이끄는 의정부 기능을 강화하였다. 지방양반의 세력 기반이 되고 있는 700여개의 서원을 철폐하여 47개 사액 서원만 남겼다. 서원은 세금을 내지 않고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있어 양반 세력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이었다. 이를 몰수하여 세력을 약화시키고 나라의 재정도 확충하였다. 또한 양반에게도 군포 세 부담을 지게 하여 집집마다 군비를 내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재정확충을 꾀하자 양반들은 결사반대를 외쳤다. 관리들의 부정이 자행되는 환곡의 폐단을 막기 위해 마을단위로 실시하는 민간 곡식 출납기구인 사창제를 실시함으로서 민생경제를 안정시켰다. 대원군이 정치를 다 잘한 것은 아니었다. 왕실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공사비가 들어가자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를 지닌 고액화폐 당백전을 마구 찍어 내었다. 당연히 돈 가치는 하락하고 현물 시세 물가는 오르는 경제 혼란을 자초하자 시장경제가 무너져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일종의 기부금인 원납전을 내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왕권을 강화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는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었으나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지 못했다. 나라 밖 정세가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일본이 서구 열강의 세력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 혼란의 시기였다. 여러 개의 돛을 달고 조선 해안에 나타난 낯선 모양의 배를 ‘이양선’이라 불렀는데 184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이양선이 해안에 출몰하여 개항하라고 기웃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산업 혁명을 완수한 서양 여러 나라는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아시아 여러 지역을 침략하였다. 1842년에는 중국, 1854년에는 일본, 1862년에는 베트남이 무력에 의하여 개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각 영국, 미국, 프랑스에 의해 강제 개방당한 것이었다. 청나라마저 외국에 점령당하자 조선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원군은 그 당시 널리 퍼지고 있던 천주교도에 대해 처음엔 포용적이었다. 프랑스 정부에 기대어 러시아 남하정책을 견제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긍정적 도움이 없자 위정척사(爲政斥邪)를 내세워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위정은 바른 것을 지키고 척사는 사악한 것은 물리친다는 말이다. 전통적 유교문화를 지키고 서양의 문화와 사상을 배척한다는 말이다.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이 프랑스 외세와 손잡고 조선을 침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천주교도 박해령을 내렸다. 1866년∼1872년에 걸쳐 프랑스 신부 9명과 8,000여 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하는 병인박해를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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