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엔 엄천강 물안개가 장관이다. 아침마당에 서서 돌담너머로 엄천강 물안개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저 그림같은 강둑길을 한번 걸어보리라 생각했는데 마침내 그 바램이 이루어졌다. 엄천 골짝 사람들과 지리산 엄천강 둘레길을 걷기로 날을 잡은 것이다. 엄천강을 따라 걷는 길은 이맘때가 가장 아름답다. 물론 봄의 풍광도 빠지지는 않고 달빛을 밟으며 걷는 길도 운치가 있지만 시월 이른 아침 엄천강 물안개 속으로 걸어보면 이맘때 걷는 길에는 뭔가 다른 감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마을 운서에는 지금 감이 익어가고 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운서 사람들은 모두 곶감 깎느라 바빠진다. 시월 말부터 감을 수확하기 시작하고 이어서 감을 깎아 덕장에 매달면 지리산 상봉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감을 얼렸다 녹이기를 반복하며 달콤한 곶감으로 만들어 준다. 배낭을 메고 마을 입구 정자로 내려가는데 등구할매가 등에 거름을 지고 밭으로 올라가신다. 팔순이 넘었는데 아직 밭일에 손을 놓지 못하신다. “할머니~ 이제 일 쫌 그만하세요~ 이러시다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요~” “그려 그려~ 근데 남들 하는 거 나도 다 하고 싶어~ 내가 놀면 뭐해~ 일이나 하지~” 꽃같은 17세에 등구 마을에서 운서마을로 시집와서 평생 고된 농사일로 허리가 호미처럼 굽으셨다. 이제는 일을 놓고 손주 재롱이나 보며 사실 나이건만 할머니는 일을 안 하면 죽는다며 일손을 놓지 못하신다.
아직 나오지 않은 일행을 기다리다 강변 큰 들인 소콧들로 내려가서 보니 마을이 띠 안개에 휘감겨 있고 안개 띠 위로 마을길(둘레길)이 지나가고 있다. 근데 따스한 햇살이 한 순간 안개를 걷어버리고 일행도 다 모이자 우리는 군내버스를 타고 오늘 걷기 출발점인 금계로 이동하여 운서마을 방향으로 걸음을 시작한다. 큰길로 버스타고 가면 10분 거리지만 강변을 오르내리고 산자락을 둘러 걷는 걸음은 두 세 시간 거리다. 기왕 걷는 거 쓰레기도 줍는다고 마대자루도 챙겼다. 일행 8명이 마대자루 8개를 쓰레기로 채우며 걷는데 생각보다 쓰레기가 많아 놀랐다. 보이는 곳보다 안 보이는 곳에 숨겨진 쓰레기가 많아 보이는 대로 다 주워 담다 보니 나락 푸대 8개가 금새 불룩하다. 둘레길 걷자고 했는데 쓰레기 푸대를 매고 걷는 모양새가 영 이상하긴 하지만 하다가 중단할 수가 없어 계속 고를 외치다 보니 푸대가 가득 차버린 것이다. 쓰레기는 페트병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캔. 고맙게도 무거운 병은 많지 않았다.
의중마을 오솔길에서 둘레길 생태 조사차 나온 사람들을 만났다. 버섯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길래 도대체 그런건 찍어서 무엇 하느냐고 물어보니 다 필요한데가 있다고 한다. 대학 교수님이랑 학생들 같아 보이는데 나는 속으로 생태 연구도 좋지만 둘레길에 쓰레기 안 생기게 할 묘안도 연구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전마을을 지나는데 다랭이 논이 그림 같다. 이 다랭이 논은 함양이 자랑하는 명소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길은 엄천강을 스치며 이어지는데 짙은 산국 향에 코가 다 시원하다. 강 건너 마을은 부처가 보인다는 견불마을. 저렇게 험한 곳에 어떻게 사람이 살 생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함양에서도 손꼽히는 오지마을이다. 이어 옛날 선비들의 계모임 장소였다는 와룡대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수다를 떨다가 운서마을로 들어섰다. 운서마을은 수확을 앞둔 감나무 천지다. 모두들 곶감쟁이들이라 다리는 터벅터벅 걸으면서도 눈은 빨갛게 익은 감을 보고 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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