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에 대하여 문학계는 문학의 고유성과 장르의 경계를 내세워 반발했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가사歌詞가 즉 시詩’이며 ‘시가 곧 노래’라고 대립했다. 언제부터인가 장르의 경계, 규정의 경계가 애매해지기 시작하고 대중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뒤샹의 ‘샘’이 이미 상식의 면상에 변기를 집어던졌고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그 획을 보다 굵게 그은 셈이다. 대중가요와 문학의 굳건한 경계가 무너지고 ‘시는 곧 노래’이며 ‘가사는 시’라는 분분한 의견들이 만연하는 가운데 밥 딜런은 침묵하고 있다. 밥 딜런의 저항의 노래는 그가 원한 세상에 조금이라도 근접했을까? 김광석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부른 이래 우리나라는 네 바퀴로만 가는 상식적인 세상으로 근접했는가. 아니면 그들의 노래는 노래로만 부르고 흘러갔는가.
밥 딜런과 김광석이 세상의 비상식적인 일을 노래로 풍자하고 대중들이 이들의 저항에 열광적으로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세계의 곳곳에서 폭력과 전쟁이 일어나고 뉴스는 우리를 놀리듯 버젓이 자생하는 ‘비상식’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글로벌한 하나의 사건이 잠잠해지면 또 다른 사건이 독버섯처럼 돋아나며 구원이라는 명분과 달리 종교분쟁으로 인한 반인권적인 폭력은 면면히 이어져왔으며 비상식을 성토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비상식을 만들어낸다. 김광석이 밥 딜런의 노래에 붙여 풍자한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비상식의 상징이 어느 순간 상식이 될 수도 있는 혼란스러운 세상이 우리 앞에 연일 펼쳐진다.
미국 대통령 후보의 도를 넘은 낯 뜨거운 발언과 우리나라의 방송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최근의 불편한 사태들도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 어느 지역 지자체는 생활거주지(독일마을, 벽화마을 등등)를 관광지로 둔갑시켜 주민들의 생활권보다 외부인 유치를 더 중하게 여기고 득도 없는 소비중심의 과도한 축제는 지역을 막론하고 지자체의 실적이라도 되는 양 가는 곳마다 민망한 이름을 붙여 과한 횟수로 진행한다. 여전히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는 먼 곳에서도 가까운 곳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어쩌면 우리는 비상식을 상식이라고 일컫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커피 한잔마저도 법령에 의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상식적인 사회라고 부르기 힘들다.
사람들은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이 적합한가 그렇지 않은가’ ‘문학이란 무엇이며 대중가요란 무엇인가’ ‘이 경계는 굳건해야 하는가 허물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분하고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재조명하고 고전까지 들추어내며 노벨상 수상의 합당한 명분을 찾고 있지만 나는 노벨상 수상의 적합성에 대한 명분보다 그들의 노래는 무엇에 기여하였는가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공허한 은유로 가득한 우리의 시, 주목을 받기위한 전략과 배치에 능한 꽃꽂이 같은 시들이 문득 떠오른다. 말만 하고 행동이 없는 사람처럼, 앉아만 있고 일하지 않는 사람처럼.
이제 우리는 상식과 비상식의 명확한 경계를 반듯하게 그어 상식을 회복해야 하며 여전히 누군가가 좋은 세상을 위한 노래를 불러야 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노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밥 딜런이 왜 저항의 노래를 불러야만 했는가에 대하여 잠깐일지라도 많은 생각을 한다. 비폭력과 반전을 노래한 밥 딜런이나 비상식을 풍자한 김광석의 노래는 두 바퀴로 가는 불안전한 세상이 아닌 네 바퀴로 가는 안전한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기여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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