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어느날 농촌의 가을 추수가 한참일때 유림회관내 함양향교 사무실을 방문하니 양희용(지곡 공배)유림이 저를 보고 간직한 책을 저에게 주셨다, 받고보니 양씨문중의 구졸암 양희선생이 지은 “용성세고” 번역판이다, 2016년1월 발행한 책으로 양세호님이 번역했다.요즈음 세상이 시끌 버끌할 때 선생의 책속에 시한수 제목"휴관(休官:벼슬을 쉬면서)"를 다시 읽어 마음을 정리해 보자 휴관동복만(休官偅僕慢)/다병세정이(多病世情移)/ 절간시무보(折簡時無報)/고문혹견마(敲門或見摩)/ 청빈인불신(淸貧人不信)/기포지심지(飢飽只心知)/ 유유성동월(惟有城東月)/은근입호규(殷勤入戶窺)/ 벼슬을 쉬고 있으니 어린 저 게으르지고/병란을 겪으니 세상 인심 변해/편지가 끊기니 때도 없이 고하고/문을두드려야 혹 갈수 있다오 청빈한 것을 사람들은 믿지 않고/여러번 굶으니 단지 마음만 알아/오직 성 동쪽에 달이 있어/은근히 집을 엿보아 스며 들어오네 이 당시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껶으면서 인심은 흉흉하고 남의 말을 믿지 않는 어려운 시대 였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청빈한 것은 믿지 않으려는 사회풍조는 더욱 심화되니 갈수록 사회를 걱정하게 한다선생의 유사에 휘는 희요, 자는 구이요, 자호는 구졸암이시니 삼사당의 둘째아들로 중종 을해(乙亥 1515년)에 태어났다. 1540년에 진사시에, 1546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향년66세때 이조참판 동지의금부사를 제수받고 동지 진하사로서 중국 연경에 전적 홍인상과 참판 신식을 대동하여 가서 선행하고 귀로에 11월23일 중국 옥하관에서 마적단 삼위달자의 두 번 습격에 (1580년) 돌아 가셨다. 이때 명나라 황조에서 증직으로 광록대부 예부상서의 벼슬을 내리고 후한 부의와 치제(공신에게 내리는 제사)글을 “문장과 절의는 동방의 꽃(으뜸)이요. 사신으로써 명을 공손이 받들었으며, 내가 궁궐 뜰에 왔을때 막내 아들을 두루 본 바 덕과 예를 닦아 이루었으며, 수고로움을 다하고 착하게 마치였다, 진실로 마음속 깊이 애도합니다”라고 내렸다선생은 1702년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구천서원(함양군 수동면 효리마을)에 배향하여 매년 봄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선생은 당곡 정희보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강개암, 노옥계, 이청연, 오덕계와 더불어 벗으로 가까이 지냈다. 대고대(지곡면 공배) 어귀에 신도비가 있으며, 함양박물관(함양 상림)에 “용성세고 목판”이 전시되고 있다..역자(양세호)는 “공은 도학과 경술에 밝으시어 일가를 이루시고 현실정치의 어려움을 다 살피시고 후손에게 좋은 일만 남기시고 돌아가신지 430여년이 지난 지금 임진왜란 전의 기록은 여러 병란에 대개 소실되었는데 남아 있는것이 다행이며 감사하고 수습하여 오역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시대의 사명감으로 번역하였습니다”라고한다.선생의 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혼란한 시대에 간신배가 권력을 잡고 흔들어 혹독한 시달림과 이를 극복한 글을 볼수 있다, 선생은 자신을 낮추어 졸(拙)하다고 구졸이라 자칭하니 화이부동(和而不同:화합하나 같지 않다는)처세로 관인의 삶을 살았다. 사림들은 양구졸암, 노옥계, 이청연을 천령 삼걸이라 말 하였다아무 할 일이 없을때 누군가가 책을 주거나 일거리를 준다면 마음의 동요에 따라 감정표현이 달라질거라 본다, 그러나 나는 즐거워 한다,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는 세상이 되어 밝은 사회가 되기 바란다..마장현 유교신문 주재기자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15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