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라는 것이 있다. 음력 시월 보름에서 정월 보름까지 3개월 동안 동안거라고 해서 산문 출입을 자제하고 수행에 정진하는 기간으로 삼는다. 겨울이 와서 동안거가 시작되면 나는 기쁘다. 왜냐면 마침내 세상과의 번잡한 관계를 멀리하고 나만의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세상 이치에 밝아진 나를 느끼기에 수행정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어김없이 겨울은 오고 자연은 자연스럽게 동안거를 통하여 나를 바르게 세워준다. “그렇지? 그렇지? 자연의 이치는 참 놀랍지? 봐 봐. 스님들이 동안거에 들어가듯 동물들도 깨우쳐서 스스로 겨울잠을 자는 거야. 겨울잠을 자면서 푹 쉬고 위를 비워놓고 머리에 든 것도 텅텅 비어 놓기 때문에 봄이 오면 가볍게 날씬하게 건강하게 뛰놀며 새롭게 산을 타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이번 겨울에는 가진 것들을 다 버리고 비워놓아야 해. 고집만 들어 있는 굳은 머리까지도 텅 비워놓아야 해.” 아내가 갑자기 신이 나서 외친다. 나는 세한도(歲寒圖)를 그려본다. 겨울이 오면 “겨울이 되어서야 솔의 푸른빛을 알게 된다.”는 논어의 말씀이 적혀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겨울에 홀로 푸른 소나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한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의 꼿꼿한 절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세한도는 완당(阮堂) 또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1840년 헌종 6년 윤상도의 투옥사건에 관련되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59세 때(1844년)에 그렸다. 당시 청의 연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보낸 일품이다. 하얗게 눈 덮인 허허의 벌판, 동토의 산하에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초가 한 채를 두고 좌로 두 그루(잣나무 인 듯), 우로 세 그루(노송 인 듯) 가지에 푸르름을 얹어 놓고 ‘나 홀로 푸르니 어쩌란 말이냐. 렛잇고(내버려 둬)’ 하고 있다. 제주에서 이십 여년 선생을 하던 나는 대정고에 근무할 때 시간이 날 때마다 오분거리에 있는 추사의 유배지 초가를 자주 찾았다. 초가 돌담 아래 제주수선화가 무더기로 피어 선비의 그윽한 묵향과 함께 천리를 달리고 있었다. 유배지에서 매서운 겨울 밤에 자세를 고추 세우고 앉아 먹을 갈고 묵을 찍어 한 점 한 점 그려 나가는 빙설의 솔가지 위 푸른 솔잎, 추사 김정희가 바로 수백 년 한설을 견디어 온 한 그루의 노송(老松)이 아니었겠는가? 스님이 동안거에 들 듯, 동물이 겨울잠을 자듯, 세상의 허잡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머리를 비우듯, 겨울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허와 공으로 비워두어야 한다. 세한도를 잘 새겨두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추사가 그의 아내에게 보낸 명문의 편지를 또한 잊을 수 없다. 추사가 1828년 4월 19일 온양의 아내 예안 이(李)씨에게 귀양지 제주에서 한글로 써서 보낸 편지를 들여다보자."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당신이 봄밤 내내 바느질 했을 시원한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을 했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놓았소. 당신이 먹지 않고 어렵게 구했을 귀한 반찬들은 곰팡이가 슬고 슬어 당신의 고운 이마를 떠올리게 하였소. 내 마음은 썩지 않는 당신 정성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집 앞 붉은 동백 아래 거름 되라고 묻어 주었소. 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일 것이오. 내 마음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소. 문을 열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소. 바다가 마당으로 몰려들어 나를 위로하려 하오. 섬에는 섬의 노래가 있소. 내일은 잘 휘어진 노송 한 그루 만나러 가난한 산책을 오래도록 즐기려 하오. 바람이 차오. 건강 조심하오." 아내의 향기. 그 아내의 향기를 맡을 줄 아는 남편. 겨울은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한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다 죽어 있지만 안으로는 모든 것이 다 살아있다. 정중동(靜中動). 겉으로는 다 정지되어 있지만 속으로는 온 힘을 다하여 심장을 한없이 달군다. 살아있다. 살아있다. 살아있음을 외친다. 노래한다. 노래한다. 살아있음을 노래한다. 생명을 생명이게 빙설로 냉동시켜 본연의 생명을 돌려주고 의식하게 하는 이 겨울, 나는 산골 삭풍 소리를 들으며 추사가 되어 세한도를 그려본다. 산골 벽난로 주전자 위에서는 쉿쉿 뚜껑을 들썩이며 끓어오르는 수증기들. 그 뜨거운 물을 한잔 부어 마시는 오 설록, 겨울이 아니면 이 맛을 나는 영원히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세한에서 만난 그 사람, 그 사랑이 아니면 나의 가슴은 영원히 덥혀지지 않았을 것이고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겨울은 가장 아늑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가슴이다. 아내의 향기다. 남자의 지조(志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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