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복사꽃이 필 무렵이었다. 일개 소대 규모의 농부들이 농업경영 개선 교육을 받느라 한명씩 돌아가며 농업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토로하는데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귀농한지 몇 해 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얘기를 듣다보면 (아~ 저 얘기는 내가 처음 귀농해서 좌충우돌할 때 이야기랑 같구나~) (아~ 저 사람도 농산물 판로가 없어서 나랑 같은 고민을 하는구나~) (흠~ 저 사람은 도시에 판로가 있는 사람이구나~ 친하게 지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남몰래 미소가 지어졌다. 얘기를 듣다 보면 김 농부 고민이 내 고민이었고 내 고민이 박 농부 고민이어서, 우리는 동병상련의 심정에서 서서히 하나로 묶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양 강소농 6기 농부들로 충청도 모 수련원에서 일박이일로 심화교육 과정을 밟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농부라지만 나처럼 모자만 밀짚인 사람이 많았다.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시동을 건 관리기에 갈비뼈가 부러져 한 달 입원한 사람도 있었고, 문전옥답에 무얼 심을지 몰라 메주콩을 심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관심농부가 대부분이었다는 말이다. 때로는 혼자서 한국농업의 미래를 짊어질 작정인 듯 원대한 포부를 밝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농사로는 밥 먹기 힘들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IMF때 귀향하여 고생 끝에 이제는 농사에 잔뼈가 굵은, 소위 일 좀 할 줄 안다는 농부도 있었지만 요즘 농사는 수확 끝났다고 다 되는 게 아닌지라, 안정된 판로가 없으면 아무리 일 잘해도 처지가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낮에 강의실에서 들은 내용을 숙소에서 밤을 세워가며 토론한 결과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마치 오랜 전투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처럼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뭉치자~ 뭉쳐야 돼~ 뭉치는 게 살길이라고 생각한 우리는 복사꽃 나무 아래서 쏘맥을 마시며 결의를 다졌는데, 모두 농산물 판매를 잘하여 부농이 될 심산이었다.
마침 농산물 직거래 법이 막 발효되어 나라에서 농산물 직거래가 활성화되도록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우리는 지체없이 농산물 직거래 조합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조합의 이름으로 판로를 개척하고 가공 시설을 설립하여 농산물의 부가 가치를 높이고 모두 부자가 되기로 했다. 자~자~ 유농부가 조합 대표를 맡으시오~ 곽농부는 총무를 하시고, 장농부는 감사를 맡으시게~ 해서, 순식간에 조합이 설립되고 가공 공장도 지어져서 모든 조합원의 농산물 판로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어 결국 모두 부자가 되었다라고 말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적토마는 달리지 않고 풀만 뜯고 있었다.
조합도 엄밀히 말하면 작은 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문 경영인이 아닌 농투성이들이 하는 기업이 아무리 작은 규모라지만 일사천리로 설립이 되고 운영이 순탄하게 되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만들어진 영농조합의 95%는 망했다는 통계치도 있다고 하니 우리는 그 95%에 들지 않겠다는 경각심에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조합을 만들되 절대로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조합 정관부터 잘 만들자는 얘기가 대세가 되어, 우리는 잘 나가다가 망한 조합들의 사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가물에 콩 나듯이 성공한 사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중하게 접근한 덕분에 우리는 전국의 망한 영농조합의 원인을 분석하고 성공한 조합의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드디어, 결코, 절대로, 지진이 나도 망할 수 없는 지리산농산물직거래조합이라는 영농법인을 설립했어야 하는 건데 적토마는 여전히 풀만 뜯고 있다. 복숭아 수확은 벌써 끝났는데 말이다. <다음 이야기-공농부의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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