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다더니 댓글이 씨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무심코 단 댓글이 씨가 되어 밤길을 비 맞으며 여섯 시간이나 걷게 된 일화다. 수년 전 이맘 때 지리산길 동호회 카페에 한 회원이 둘레길 후기를 올렸는데 마침 그게 지리산 둘레길 옆에 있는 우리 집을 지나는 구간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내가 살고 있는 운서마을 엄천강 둑길은 보름에 달빛을 밟고 걸으면 참으로 바삭바삭한 길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늦은 밤 엄천강변을 지나다가 강에 빠진 보름달이 참 보기 좋았던 기억에, 자랑질 하느라 그냥 달아본 댓글이었다. 그런데 내가 무심코 단 이 댓글이 씨가 되어 그 회원의 가슴 속에서 싹을 틔웠다. 그 회원은 달빛 밟기를 친한 친구들이랑 같이 하고 싶다는 답글을 달았고 나도 기회가 되면 기꺼이 같이하고 싶다고 답글에 답글을 달았는데, 그것도 사실은 맞춰본 장단이었다. 서울 사는 사람이 정말 밤길을 걸으려고 지리산까지 내려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회원은 정말 추석에 달빛 밟기를 하겠다고 친구 4명을 꼬셔서 내려왔고, 나도 내가 한말에 책임을 지느라 마을 친구 김용대를 꼬셔 일곱 명이 용유담에서 화계리까지 달빛 밟기를 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 일곱 밤도깨비가 기대했던 것은 소설 ‘메밀꽃이 필 무렵‘에 나오는 꿈결같이 흐믓한 달빛 밟기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날 밤 내내 비가 오락가락했다. 그것도 시작부터 세차게 내려 포기하자는 말까지 나오게 되니 서울서 내려온 길동무들은 완전 울상이 되었는데, 다행히 잠시 비가 그친 틈을 타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하늘이 온통 구름으로 덮여 있었는데도 신기하게 밤길이 어둡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반투명 효과였던 것 같다. 달빛이 창호지를 뚫고 방안을 은은히 밝히듯 구름을 뚫고 엄천강 밤길을 비춰주었던 것이다. 출발은 했지만 또다시 비가 내려 송전마을 정자에서 한동안 비를 피하다가 다시 문정으로 걷는데 강 건너 골짝마을 풍경이 수묵화를 보는 것 같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불빛들이 사방으로 빛의 투망을 던져 구름을 거두고, 보이지 않는 달은 구름을 투과하여 희미하게 산 능선을 그린다. 문정에서 운서 동지골을 지나는데 잠깐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구름 뒤로 들어가 버린다. 마치 너무 바쁘고 귀하신 몸이라 인사만 하고 들어가는 것 같다. 일행은 적송 숲길을 지나 내리 꽂히는 듯한 경사 길로 미끄러져 내려가 운서 강둑길을 걷는다. 그리고 운서 소연정에서 잠시 쉬었다가 구시락재를 힘겹게 넘어 동강마을로 들어선다. 동강 정자에서 다시 세차게 내리는 비를 피하고는 자혜리 강둑길을 걸어 엄천강 하류인 화계리로 걸음을 이어가니 새벽 4시가 넘었다. 비가 오면 정자로 피하고 비가 그치면 걷고, 장장 6시간 걷거니 쉬거니 한 것이다. 일행은 화계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친구 김용대의 트럭을 타고 용유담에 주차된 차를 찾으러 되돌아갔는데 겨우 10여분 걸렸던 것 같다. 6시간짜리 테잎이 10분 만에 되감기되는 동안 나는 트럭 짐칸에 거꾸로 앉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침을 흘리며 꿈을 꾸었는데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달빛을 밟으며 철둑길을 걷는 꿈이었다. 내 인생 오십을 되감기하는 달빛어린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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