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동물들은 계절과 날씨 변화에 따라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만, 별도의 내부 정보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생물학자들이 밝혀내었다 합니다. 서캐디언 리듬이라고 불리는 동물들의 독특한 생체리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베른트 하인리히’가 쓴 ‘동물들의 겨울나기’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동물들에게는 내부 달력이 따로 있어서 외부 날씨 변화와 별개의 일정으로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키우고 먹이를 저장하고 동면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동물들의 행동에는 외부의 변화보다 내부의 정보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거지요. 그러고 보니 십 년째 곶감쟁이로 살아온 나의 생체리듬도 계절의 변화와는 별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새 봄에 씨를 뿌리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보통의 농부라면 가을이 시작되는 이 시기에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맘때면 얼른 수확을 하고 난 뒤 동면하는 동물처럼 편안한 휴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호흡이 한결 느려지겠지요. 그런데 곶감을 깎아 일년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나는 가을이 시작되는 이 시기에 (감이 굵어지고 붉게 변하는 시기에) 씨 뿌리는 봄 농부처럼 새 희망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게 된답니다. 가을에 이어 가장 춥고 힘든 계절이 다가오는데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와 열정으로 몸 안에 호르몬이 최고조로 분비되는 것입니다. 동물들에게 있는 서캐디언 리듬이 곶감쟁이에게도 있다는 것이지요. 농부의 생체리듬도 외부의 변화보다 내부의 정보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십년 째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온 아내의 생체리듬도 계절의 변화와는 다르게 움직여 왔습니다. 아내는 고용이 안정되어 있는 정교사와는 달리 매년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비정규직 강사라 계약이 만료되는 여름이면 고용 불안에 생체리듬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그러다 무사히(?) 재계약을 하고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 다시 컨디션이 최고조로 올라갑니다. 옆에서 지켜보면 재계약 전후 급성 우울증이 발병했다가 자연 치유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을의 처지에서는 사용자가 재계약을 안 해주면 그걸로 실직인데, 아내가 이번에는 재계약을 하지 못해, 십년간 아내를 지배했던 비정규직형 서캐디언 리듬에 큰 혼란이 생겼습니다. 지금쯤이면 아내의 생체리듬이 최고조에 달해 가을학기에 대한 새로운 계획과 의욕으로 들떠야 하는데 말입니다. 동물과 곶감 깎는 농부와 같이 비정규직형의 특이한 서캐디언 리듬에 익숙해 있던 아내는 내부 정보가 바뀌자 다시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보통 사람의 생체리듬에 적응하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산책하고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텃밭에서 풀을 메고 쪽파를 심고 가을상추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아내는 시골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영어학원에서, 내려온 후에는 학교에서 계속 영어를 가르쳐 왔습니다. 평생 아이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만 해왔기에 귀농한 남편 따라 농부로 변신을 못하고, 지금도 여전히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미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긴 사람 일이란 게 알 수 없는 거라 언제 또다시 자리가 나서 학교로 나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아무쪼록 나는 아내가 그동안 겪었던 특이한 서캐디언 리듬의 부작용에서 벗어나고,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순응하는 보통 사람의 건강한 생체리듬에 하루 빨리 적응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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