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가 별 효과 없이 11살에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의 외척가문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19세기 전반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60년간 세도정치가 나타난다. 순조 때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헌종 때 조만영, 조인영을 중심으로 한 풍양 조씨, 철종 때 김문근 김좌근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이 정치를 쥐고 흔들었다. 16세기 초 여진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임시회의 기구 였던 비변사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3정승이 참여하며 최고결정기관이 되었다. 이 자리에 외척 가문들이 주요직책을 차지하여 좌면 좌, 우면 우로 나라를 좌지우지 했다. 이 외척 관리들은 강남 땅처럼 관직을 고가에 사고팔고 하였다. 관직을 산 사람은 임지로 떠나 그 자리에 가서 임기 내에 빨리 본전에 본전을 뽑아야했다. 프리미엄을 얹어 뽕을 뽑았다. 수령 자리는 보통 2만냥, 도백인 관찰사 자리는 5만냥으로 거래되었다. 죽어나가는 사람은 백성들이었다. 세금에 세금에 세금을 내야하니 현기증에 하늘이 노랄 뿐이었다.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삼정의 문란이다. 토지세 전정과 국방비 부담인 군정과 쌀을 빌리고 갚는 국가 국민은행의 본전과 이자의 관계에 있는 환정, 즉 환곡의 문란이 극에 극을 달하고 있었다. 삼정이 문란한 현장을 VJ특공대가 찾아 가 본다. 1 전정이 문란한 현장 (토지세) 관직을 돈 주고 사고 온 관리: 농사를 지었으니 토지세를 내거라. 10가마니다.농사꾼; 올해 제가 수확한 쌀이 10가마인데 10가마를 내라니요? 이 땅은 농사를 진 내 땅이지만 저 땅은 황무지라 농사지은 적이 없는데도 세금을 내라고요? 그리고 그 땅은 가족공동묘라 농사지을 수 없는 땅인데 세금을 내라니요?관리: 말이 많구나 농민이 토지세를 내지 않다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매우 쳐라. 2 군정이 문란한 현장 (국방비)매관매직 관리: 북한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위기인 이 때에 국방비는 왜 내지 않느냐?농사꾼: 국방비 군포 1포을 냈는뎁쇼.매직관리: 이놈아, 네 집은 남자가 네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4포을 내도록 되어있다. 농사꾼: 나리, 제 아버님는 재작년에 이미 돌아가셨고요(백골징포). 남자는 올해 5살짜리 아기인뎁쇼(황구첨정). 나머지는 여자인데 어찌 네 명분 4포를 내라고 하는디요? 매만 아는 나리: 말이 많다. 군포를 안내면 인징(隣徵)으로 받아라. 친척이 내던가(족징) 동네에서 내던가(동징) 아니면 무조건 매우 쳐라! 3 환정(환곡)이 문란한 현장(금융권 고리대금) 관청 양곡관리 사채업자 나리: 봄인데 쌀 없지? 쌀 빌려가라.농사꾼: 이자가 열배가 넘어 굶겠어요. 안 빌려유.고리에 환장한 나리: 빌려가라면 빌려 가지 말이 많다. 의무 배당 2가마.농사꾼: 가마니 열어보니 쌀 1/3, 모래 1/3, 빈 죽정이 1/3인뎁쇼.나리: 쌀은 내용이 아니라 포장이 중요하다. 이 쨔샤! 가을에 본전에 이자 합쳐 10가마니 알곡으로 가져오는 거 알지? 탐관오리가 날뛰는 착취에 농민들은 살 수 없었다. 농촌을 버리고 떠돌거나 도적떼가 되거나 대자보로 비리를 알리는 벽보를 붙였다. 마침내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가 왕이 되어 태평성대 나라가 세워 질 거라는 예언서 정감록과 도참설 등이 유행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흉흉하면 이런저런 유언비어가 나돌기 마련이었다. 평안도에서 몰락양반이었던 홍경래가 농민 중소상인 광산 노동자까지 합세하여 백성 착취와 평안도에 대한 차별정책에 반기를 들고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다(1811년). 한때 평안도 청천강 일대를 장악했으나 정부군에 의해 정주성에서 홍경래는 사살되고 5개월 만에 진압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임술년 진주에서는 진주농민봉기가 일어났다(1862년). 지방방위사령관 격인 경상우병사로 온 백낙신이가 돈 주고 산 관직의 본전을 뽑으려고 군포 강제징수를 단행했다. 진주농민들이 누구던가? 논개가 있고 김시민 장군이 있고 충효의 고장이 아니었던가. 몰락양반 유계춘을 중심으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몽둥이를 들고 운동권 노래를 부르며 시장에서 진주성까지 진격하여 점령하였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민란이 급속도로 펴졌으며, 멀리 함경도와 제주도 등 30여 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급히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진주안핵사로 임명해 수습하게 하였다. 지방관의 수탈이라고 파악하고 탐관오리들을 엄중 처벌할 것을 요청했지만 상부에서는 관심이 없어 시정된 것은 별로 없었으니 불쌍한 것은 삼정의 문란 속에 죽어가는 것은 농민들 뿐 이었다. 홍경래 난과 진주 임술농민봉기를 통하여 탐관오리의 착취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저항의식과 사회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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