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제게 갑상선항진증이라는 병이 찾아왔어요. 지금이야 의술이 좋아져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나, 그땐 흔치 않은 병이었으며 많은 양의 약을 장기간 복용해도 쉽사리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다 서른 살에 결혼을 했고, 결혼 후 일 년이 지나도 임신 소식이 없었어요. 갑상선에 걸리면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주변에서 들었을 때, 임신 되지 않는 것이 모두 제 탓인 것 같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 용기를 내어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지요. “갑상선 검사를 했는데 다 나았군요. 이제 아기가 생길 겁니다.” 의사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 저는 뛸 듯이 기뻤고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리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약도 먹고 체력을 키우며 열심히 엄마가 될 준비를 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아들을 낳았고 또 바로 이어 13개월 터울로 딸을 낳았지요.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이 많았던 저에게 이렇게 연이어 아기 복이 터졌습니다. 아!... 그런데 쌍둥이보다 더 힘든 게 연년생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친정과 시댁 어디서도 저의 육아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오로지 저 혼자 힘으로 연년생 아이 둘을 돌보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었어요. 하루는 큰 아이가 아파 병원을 다녀와야 하는데, 마침 둘째 딸이 자고 있었어요. ‘온유가 깨기 전에 얼른 다녀와야지...’ 하고 유모차에 큰애를 태우고 씽씽 달려 진료를 하고 왔는데, 그 사이 딸아이가 깨어서 울고 있었어요. 아이는 고작 생후 3개월 이었는데 가만히 누워 옴짝달싹도 못한 채 얼마나 울었던지 이마와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어요. 그걸 본 저는 아이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좋아하여 동네 아기들을 거의 다 업어주다시피 했답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를 많이 업어서 키가 크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아이 사랑에 푹 빠진 조그만 엄마가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을 어느 날 하루는 꿈을 꾸게 됩니다. 굵직한 비단 구렁이가 우리 안방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는 꿈을 말이죠. 다음 날 저희 옆집에 사는 하림이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하림이 엄마, 어제 구렁이가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는데, 아마 하림이 엄마한테 좋은 소식이 있으려나봐.” 아들을 기다리는 하림이 엄마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얘기 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바로 저희 막둥이 태몽이었던 것입니다. 1997년 우리나라에 IMF라는 폭풍이 불어 모두가 힘들어 하던 시절. 당시 남편은 서울에서 작은 여행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200년 만의 홍수로 인해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사무실에 물이 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홍수로 인해 모든 집기들은 물에 둥둥 떠올랐고, 여권이 젖고 비자 스탬프가 지워져 손님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답니다. 이런 와중에 저의 임신은 당연히 반갑지 않았겠지요. 게다가 첫째, 둘째 아이 모두 제왕절개로 출산을 한터라 셋째 아이까지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우리 형편을 아는 사람은 누구라도 말리고 싶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제 임신 소식을 들은 친정 식구들 특히 부산에 사시는 친정어머니는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해대십니다. ‘희야, 수술하면 네가 죽는다. 애를 지워라. 애가 중요하냐? 네가 살아야지...’ 세 번이나 수술대에 올라야 하는 딸을 생각하는 친정어머니의 심정을 모르는바가 아니건만 저는 전화를 받고나면 속상하고 힘들어 펑펑 울기가 일쑤였어요. 아이를 지운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루는 제 마음속에 이런 확신이 생겼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단호하게 말씀을 드렸어요. “엄마, 아이는 자기 먹을 것은 다 갖고 태어난대요. 그리고 그때가 되면 고등학교도 의무교육이 될 것이니 제발 아이를 지우라는 말은 하지마세요 !” 이 후 어머니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물러가셨으며, 또 하늘이 도우셔서 무료로 제왕절개해주는 병원(서울도티병원)을 지인이 소개해주어 무사히 아이를 낳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감사한 일로 기억되며, 아이는 과연 하늘이 주시는 것이구나!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할 당시 담당의사 선생님께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넷째까지도 출산할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이 셋 데리고 다니는 엄마는 흔치 않아서 아이 셋을 데리고 버스라도 타면 일제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했죠. 아이들 씻기고 먹이고 놀아주다보면 저녁엔 완전 녹초가 되어도 그 와중에 깨알같이 적은 육아일기와 가족신문(하늘빛가족신문)은 우리 가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소중한 가보가 되었어요. 요즘 저출산과 결혼기피현상 등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이때, ‘늦둥이라도 볼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게제가 말한 대로 셋째 아에게 고등학교 수업료를 지원해 주는 제도가 생겼으며, 대학생은 국가 장학금 제도가 있어 교육비로 인해 걱정하는 일은 덜고 있어요. 저희 가족이 서울에서 이곳 함양으로 귀촌한지 어언 7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함양은 공기 좋고 물 좋은 선비의 고장으로 소문이 나 있지만 저는 아이 낳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 덧붙이고 싶어요. 아이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엄마가 되어 하늘이 준 생명을 잘 돌보고 키우는 것이 여자로 태어난 또 다른 목적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자녀를 키우며 느낀 보람은 일일이 지면에 다 적지 못하였으나 부디 이 곳 함양에 아이들이 더 늘어나고 자녀 갖기 원하는 가정들이 점점 더 많아지길 소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맺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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