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에서 나고 자라 나이 들어 반평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참 더디게 상림을 비롯한 고장의 변화를 보아왔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낯선 삶들의 감탄에 쉽게 동조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천연의 모습에서 시민 문화공간의 공원으로 변화되는 동안 오히려 예전의 고즈넉함을 그리워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사라진 박탈감을 홀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장마가 시작되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시각에 옛 상림의 고즈넉함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섰다. 조각난 구름 사이로 청명한 코발트 빛 하늘이 보이고 따가운 햇살이 퍼지지만 이틀 동안 내린 비로 인한 숲의 습기는 여전히 나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죽장마을 앞 대죽교 아래로 흙탕물이 아우성치며 달려가는 것을 유유히 바라보며 걷다가 비석들과 조형물이 있는 공원에서 잠깐 쉬어 갈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주변의 나무벤치가 젖어 있어 할 수 없이 반듯하게 다듬어진 바위에 앉았다. 태양열을 받아 따끈하다. 그 온기는 나의 무지근한 몸과 피로했던 눈을 - 심 봉사 눈 뜬 거 마냥 번쩍하고 빛나게 했다.
그러자 평소 무심히 지나치던 인물공원에서 나의 시선이 멈췄다. 마주한 11인의 흉상 중 시선이 다른 하나의 흉상은 이전까지 평범하게 보아왔던 그 공간을 순간 낯설게 만들었다. 그 하나의 흉상은 옛날 혁명가의 삶이 거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체 게바라 못지않은 목숨을 거는 오늘날에는 참으로 낯선 삶이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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