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엄마, 오늘 우리는 자장면 먹고 시프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엄마: 그렇지? 짜장면 먹고 싶지? 엄마도 땡겨. 여보세요, 중국에 있는 사천성에 천하태평 반점이지요? 여기 짜장면 곱빼기 세 그릇과 탕슉 하나와 탕평채 하나 배달민족에게 빨리 배달해 주세요. 아이돌을 모르는 아이들: 엄마, 자장면은 알겠는데 짜장면과 턍슉과 탕평채는 뭐야?아이들과 아이돌을 함께 사랑하는 엄마: 자장면은 옛날에 짜장면이라고 불렀단다. 그리고 옛날에 어느 엄마가 우동 짬뽕 같은 두 글자로만 말해야 음식을 시켜준다고 하니까 애들이 뭐라고 불러 자기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시켰는지 아니? 탕수육인데 탕슉이라고 말해서 먹었단다. 그리고 탕평채는 ... 요리의 대가 빅마마: 오늘은 고급스러운 음식 탕평채를 만들어보겠습니다. 탕평채는 청포묵을 데쳐서 쇠고기, 숙주, 버섯과 지단, 김가루 등을 뿌려서 먹는 아주 고급스러운 한식 음식인데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청포묵은 저칼로리 식품으로 다이어트에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동인서인남인북인노론소론 편당에 붕당붕당 붕붕붕붕 당당당당 말만 많은 붕당정치에 이골이 난 영조는 어느 날 대신들을 집에 초대하고 음식을 내왔다. 청포묵에 여러 가지 나물이 놓인 색다른 궁중음식이 나왔다. 붕붕당당 신하들: 전하, 못 보던 음식이옵니다. 영조: 이 음식의 이름은 탕평채라 하오. 모든 반찬이 골고루 다 섞여 있어 이것저것 섞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오. 소스에 각각 섞어 먹으면 탕평채, 고추장에 비벼 먹으면 비빔밥이오. 나는 이제부터 동서남북 노소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이끌어 가려 하오. 육해공군 가리지 않고 무차별 인재를 뽑아 전선에 배치할 테니 협조해주기 바라오. 영조는 붕당대립의 완화와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탕평정치를 실시했다. 노론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였다. 탕평비를 세우고 고른 인재를 쓰며 여러 개혁정치를 추진했다. 탕평(蕩平)이란 『서경』에 나온 <왕도탕탕(王道蕩蕩) 왕도평평(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서 왕이 지켜야 할 법도와 도리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조는 민생안정과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군역의 폐단을 개혁했다. 16세에서 60세 사이 군대를 가지 않는 사람은 국방비를 부담했다. 세금을 매년 베 2필씩 바쳤는데 1필로 경감시켜 주는 균역법을 실시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대신 토지 소유기준으로 하여 양반들도 세금을 내어야 했다. 영조는 주리를 틀고 인두로 지지는 무서운 고문이나 때려서 반 죽이는 무자비한 형벌을 금지시키고 억울한 사람은 신문고 북을 울려 높은 사람의 판결을 받을 수 있는 민본중심의 정치를 펴서 인기차트 1위를 수년간 차지했다. 그러나 옥에 티가 있었다. 영조는 자식에 대한 기대의 욕심이 지나쳐 자기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비정하게 죽이는 씻지 못할 패륜을 저지르고 만다. 사실 이것도 노론과 소론의 간계와 음모 속에서 붕당의 변질이 가져온 비극의 결과였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25세의 나이로 22대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식에서 내뱉은 첫마디는 이랬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말은 나의 아버지를 죽음에 몰아넣은 사람들은 각오하라는 선전포고요 복수의 칼날을 휘두를 것을 예고하는 무서운 폭풍이었다. 신하들은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었다. 그러자 정조를 죽이려는 무리들이 많아 자객들이 밤이면 밤마다 날뛰었다. 정조는 어릴 적 아버지가 가르쳐준 무예의 솜씨도 뛰어났다. 정조는 홍국영을 대장으로 하는 국왕의 친위부대 장용영을 설치하여 목숨을 유지했다.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 부대는 나중에 국방을 지키는 5군영의 하나로 편입된다. 젊은 학자들이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규장각을 재정비하고 상업이 번성할 수 있도록 몇몇 재벌에게만 허용했던 상권을 일반 중소기업이나 일반 소규모 상인들도 서울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이나 종로나 어디에서든지 마음대로 장사할 수 있도록 금난전권을 폐지하였으니 이야 말고 정조의 애민애족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도세자의 아내이며 『한중록』을 쓴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정조의 효는 왕가의 일화로 내려온다. 정조는 뒤주에서 9일만에 여름의 열사와 목마름의 갈증과 굶주림으로 가장 잔혹하게 죽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세종시와 같은 계획도시 수원 화성에 왕릉을 옮기고 매년 제사를 지내기 위해 행차하였다. 그 모든 기록이 외규장각 도서 ‘의궤’에 그려져 있었다. 정조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적 문화융성의 시기였다. 서얼신분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가 등용되어 ‘북학의’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모두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지원의 제자들로서 중상학파의 거두들 이었다. 영조와 정조가 시행한 탕평정치는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붕당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붕당의 뿌리가 너무나 깊게 박혀 있었다. 정조가 죽은 후에 노론의 독주는 다시 시작되었고 일부 외척가문이 권력을 독식하는 세도정치가 등장하였다. 얼짱 엄마: 여보세요, 아직도 짜장면과 탕슉과 탕평채가 배달이 안됐는데 언제 배달 될 거에요? 뭐라고요? 금방 오도바이에 싣고 떠났다고요? 믿거나 말거나라고요? 이제 됐다. 그마 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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