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이 인구늘리기 시책으로 (사)한 자녀 더 갖기 운동본부 함양군지회와 공동으로 ‘임신·출산·육아 성공사례수기’ 공모전을 실시했다. 수상작은 총 11편이며 다음은 우수상 수상작이다.
결혼생활 20년 저는 2남 2녀의 자녀를 둔 엄마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울기도 웃기도 많이 했습니다. 22살 어린나이에 큰딸을 놓고 키우면서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밤낮이 바꿔서 너무 힘도 들었고 젖이 잘나오지 않아 아이가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아장아장 걸을 때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참 많이도 웃었습니다. 지친 우리부부의 활력소였습니다. 둘째가 생기고 낳았습니다. 첫째와는 다른 둘째는 잠도 잘 자고 먹기도 잘 먹고 놀기도 잘 놀았습니다. 두 아이는 서로 의지하면서 때론 울고 웃고 싸우기도 하고 돌아다니면서 사고도 많이 치면서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습니다. 장난감이 많이 없다보니 서랍이며 싱크대를 열어서 냄비와 그릇을 꺼내고는 싱크대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냄비를 뒤집어 놓고 두더리기도 하고 엄마 화장품을 죄다 꺼내서 얼굴에 바르기도 하면서 서로처다보곤 깔깔깔 웃으며 놀기도 많이 했습니다. 둘만 잘 키우자고 맹세하는 와중에 셋째가 생겼습니다. 둘 키우기도 너무 힘든 가정형편이라 도저히 하나 더 키우기는 너무 힘도 들고 몸도 좋지가 않았습니다. 애기아빠도 몸이 아파 일년간 쉬어야 하는 상황이라 우리 부부는 셋째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나의 무능력에 한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2년이 흘러 아이가 또 생겼습니다. 피임을 했으나 아이가 또 생겨서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한편으로는 축복 받았다는 생각에 검진을 받으로 갔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는 아이를 꼭 낳아야 하냐고 피임약이 아닌 자궁내의 피임이라 혹시나 머리쪽을 스쳐지나 갔을 수도 있다고 하시더군요. 정상적인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고... 결정은 부모가 하는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살아있는 생명를 포기한다는 건 참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또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떠난 아이들에게 너무나 죄스러워서 그 아이들이 다시 우리곁에 올수도 있다는 마음에 셋째를 마음먹고 가지기로 했습니다. 노력한 결과 1년 지나서 아이가 생겼습니다. 너무너무 기뻤고 행복했습니다. 아이가 생기고 사업도 무궁무진 하게 발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도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9개월쯤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제가 일을 하는 도중에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일어나서 119에 실려 병원을 가게 되었습니다. 잘 놀고 있든 아이가 얼마나 놀랐는지 움직이지도 않고 손가락이 아픈 것 보다 아이가 걱정이 되어서 병원 도착 하자마자 아이부터 봐주라고 손가락은 없어도 되니까 아이부터 살려 달라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최악에는 아이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더군요. 아이를 먼저 살리기 위해 수술을 하고 손가락 봉합수술을 해야겠다고 하시면서 수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이가 너무 놀라서 얼굴은 경직되어있고 피부 색깔은 새파라게 질려 있었다고 일주일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전 손가락 봉합술로 침상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를 위해 침상에 누워서 밤낮으로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초유를 먹여야 한다는 마음에 침상에 누워서 초유를 짜서 먹이기도 했습니다. 다행이 일주일 지나 아이의 혈색도 돌아오고 경직되었든 얼굴도 환해져서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이는 잘 자랐지만 병치례로 병원 입원 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일년이 지나 생각지도 못한 넷째가 생겨버렸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낳고 싶은 생각이 솔직히 없었습니다. 아이 아빠는 하나 더 낳아서 잘 키워 보자고 셋이나 넷이나 다를게 없다고 하면서 찬성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의견도 물어 볼견 가족회의 결과 큰딸의 강력한 한마디에 찬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주신 생명을 없애면 안 된다고 자기가 엄마를 도와서 동생들 잘 돌봐 주겠다고 하더군요. 넷째를 출산하고는 아니나 다를까 큰딸은 학교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와서 엄마인 나를 도와 아이도 봐주고 귀저기도 갈아주고 집안 청소도 얼마나 잘하는지 엄마인 저보다 더 깨끗이 잘하더군요. 든든한 큰딸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아이들은 씩씩하게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커면서 얼마나 사고를 치는지 아파트 집 베란다 창문 너머로 장난감이며 TV 리모컨을 던지고 주차해 놓은 차유리가 박살이 나기도 하고 집에 있는 장롱 문을 타고 놀아서 문짝이 성한게 없고 서랍장에 옷이라는 옷은 죄다 꺼집어내고 계단 만들어 놀기도 하면서 손가락이 끼어 울기도 울고 참 개구쟁이였습니다. 셋째 아이가 태어날 때 힘들게 태어나서 인지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병원 입원에 수술도 하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까지는 병원을 집 드나들 정도로 많이 다녀야 했습니다.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지요. 지금은 네 형제가 아픈데 없이 잘 자라 주는 게 너무 감사 할 따름입니다. 형제가 많아서 각자 맡은 일에 스스로 책임지고 하는 편입니다. 스스로 독립성도 길러지고 책임감도 있고 사회성도 길러지더군요. 20년동안 아이들을 키우면서 힘들어도 아이들 웃음소리에 힘든 생각 하지 않고 쓰러지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곤 했습니다. 너무 듬직한 큰딸과 큰아들 천방지축이지만 눈물도 많고 애교 많은 작은아들 과 막내딸 세상이 나에게 보내준 가장 큰 선물들입니다. 엄마는 우리 아이들이 있어 너무 고맙고 행복합니다. 사랑한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