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은 인조를 16대 왕으로 앉혔다. 인조와 서인들은 의리를 중시하여 친명배금 정책을 폈다. 즉 명나라를 하늘같이 섬기고 만주 지방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무서운 속도로 커지고 있는 후금(後金)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라 하여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후금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인조반정 때 이괄은 군대를 진두지휘하여 공을 많이 세웠으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나 있던 중 오히려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을 받자 1624년 `이괄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괄의 부하들이 후금으로 도망가서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를 때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에 후금은 정묘호란(1627년)을 일으키고 3만의 군사가 후방의 가시였던 조선을 치러 내려왔다. “앞으로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명나라는 쳐다보지도 않겠습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다. 후금은 만주에서 더욱 강성해지자 이름을 청(淸)이라 바꿨다. 홍타이지 청태종은 형제관계가 아니라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우리 사람 너 같은 동생 둔적 없다 해. 너희는 앞으로 우리의 신하가 되어 엎드려 예의를 갖춰라 해. 그리고 황금 1만냥, 군마 3,000필, 군사 3만명 보내라 해.” “뭔 개소리여- 그럴 수 없다.” 인조가 거절했다. “그렇게 하면 아주 후회하게 돼. 우리사람 무지막지 해. 지금 쳐들어가니 기다리고 있어라 해.” 홍익한 윤집 오달제 삼학사와 예조판서 김상헌 정온은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였다. 청의 요구를 들어주어 전쟁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이조판서 최명길은 주화파의 대장이었다. 처음엔 싸우자는 척화파가 우세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싸울 힘이 없는데 어떻게 나라만이라도 보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실리적 주화파가 힘을 얻었다. 청 태종이 직접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 2만 등 12만 대군을 끌고 2차로 쳐들어 왔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1636년). 임경업이 의주 백마산성에서 항전했지만 일주일만에 한성이 함락되고 강화도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히게 되었다. 45일간을 버티었으나 혹한의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굶어 죽게 되었다. 결국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했다. 청태종: 조선왕이 삼전도(송파구 석촌동)에 나와서 신하의 예를 갖춰 항복하라고 해. 삼배구고두(三拜九臯頭)하라고 해. 인조: 한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에 박는 절을 하면서 9번 머리를 처박으란 말이냐?청태종: 그렇다 해. 그것도 땅이 울려 내가 느낄 수 있도록 피 터지게 박으라 해. 한 나라 왕으로서 백성과 신하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머리를 땅에 박아 이마에 피를 흘리며 항복문서를 바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어찌 목숨에 그렇게 연연했던가? 죽음으로 그런 굴욕과 치욕은 보여주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청태종: 절 아주 잘했어 해.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우리 사람 청나라에 인질로 끌고 가겠다 해. 삼학사도, 대신들 마누라들도, 궁녀도 다 끌고 가겠어 해. 병자호란 3년 뒤 `대청황제공덕비` 즉 삼전도비를 강제로 세우게 했다.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이 비를 강물 속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다른 민족에게 지배되어 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꺼내 세워 놓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삼전도비를 주민들이 다시 땅속에 묻어버렸는데 1963년 홍수 때 징그럽게도 비가 내려 다시 그 비가 나타났다. 치욕스런 역사를 잊지말고 되새기리라는 하늘의 뜻일까? 지금까지 세워져 있다. 청은 인질 수만명을 끌고 갔다. 돈을 내면 인질을 풀어주었는데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할 돈이 없었다. 설사 보상하고 청에서 돌아왔다 해도 사람들은 청에서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국가와 조상에 대역죄가 된다고 자결하라고 했다. 여자는 몸을 더럽혔다고 하여 시집에도 친정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유랑아가 되었다. 나라마저 백성을 버렸다.1645년 8년의 볼모생활 끝에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이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물과 당시 청나라에 들어와 있던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과 천주교에 깊게 빠져있었다. 이로 인해 소현세자는 인조로부터 신임을 잃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병으로 눕게 되고,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에게 세 차례에 걸쳐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돌연 죽고 만다. 인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설은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인조의 뒤를 이은 17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다. 반청(反淸) 척화파 인사들인 김상헌, 김집, 송시열 등을 요직에 등용했다. 대대적인 군비증강을 본격화하면서 복수의 북벌 계획을 은밀히 세워나갔다. 어영청은 북벌의 선봉부대였다. 그러나 청나라를 대항하여 북벌을 하려던 효종의 뜻은 재위 10년만에 효종이 41세 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