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8일,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목숨을 잃은, 19세 청년의 사연이 두고두고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이 사건 불과 열흘 전, 강남역 번화가 화장실에서의 20대 여성의 ‘묻지마 피살’로 국민들의 공분과 추모의 슬픔이 채 가기도 전에, 또다시 구의역에서 청년노동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과 국화가 쌓였습니다. 추모 열기와 분노도 연례행사처럼, 잊혀지는가 하면 또 반복되는 참사를 곱씹으며 우리 사회의 깊어가는 불안과 분노의 심각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컵라면 하나 먹을 시간조차 없었던, 여린 청년의 목숨을 누가 무참히 앗아갔을까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사회에 발을 내딛은, 꽃다운 청년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남들은 다 쉬는 토요일 저녁, 비정규 노동자 김 군은 가방 속 컵라면만 남긴 채 비정한 이 사회를 영원히 떠났습니다. 144만원의 월급 중 100만원을 저축해서 대학에 진학하려 했던 소박한 꿈조차 짓밟은 ‘사회구조의 부조리’가 치를 떨게 합니다. 우리 사회는 갈수록 비정하고 냉혹한 사회로 치닫고 있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그 청년의 단순 과실로 덮으려고만 했습니다. 2인1조 근무원칙도 지켜지지 않은, 위험한 작업 현장에서 역 구내로 진입하는 전동차를 피하지도 못하고 그는 홀로 죽어갔습니다. 누구보다 성실했던 이 청년의 참사가 우연이라 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많은 젊은이들에게 당면하는 노동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흔하게 반복되는 유사 비극들이 이전에도 일어났음에도 내 가족이나 친지가 아닌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우리는 일상처럼 눈을 감아왔습니다. 사고만 터지면 당사자의 책임과 마녀사냥으로 깃털만 건드리고, 늘 본질은 고쳐지질 않고 덮어졌습니다. 이 참사는 언론보도처럼 서울메트로와 하청업체 은성PSD의 유착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진 자들이 이익을 나눠 먹는,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희생된 것은 다름 아닌 신출내기 19살 청년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실체에서 나타났듯이, 경영 효율성만을 내세운 논리 앞에서는 노동은 상품화되고, 노동자는 사회를 유지하는 도구나 부품으로 전락되기 마련입니다. 이미 노동의 현장에서는 경영의 메커니즘으로 인간을 기계처럼 예속시키고, 생산재(生産財)처럼 치부하는 비인간화가 합리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금권과 권력이 판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회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기득권의 성벽이 갈수록 견고하여 서민층의 계층이동은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부와 권력이 독점되는 이 사회에서 신출내기 젊은이들이 갖는 꿈은 너무도 처절합니다. 이 땅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여유로운 삶은 고사하고 요행히 취업되더라도 비정규직의 노동에 혹사되고, 단순히 땀 흘려 일하고 성실하면 ‘행복한 삶’이 될 것이란 원론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정직하고 책임감 있게 상사가 시키는 일을 잘 하라.”고 했는데 그게 자식을 죽인 원인 같다고 한, 참사를 당한 김 군의 어머니의 절규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헬조선(지옥을 뜻하는 ‘hell’과 ‘조선’의 합성어로 대한민국이 살기 힘들고 희망이 없음을 풍자하는 말)’, ‘흙수저’, ‘금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각자도생(알아서 살아야 한다)’이란 자조적인 말들이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합니다.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과 까뮈의 소설 ‘시지프스의 신화’의 ‘부조리’가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위험사회는 분노사회로 이어지고 공동체를 해체한다고 했습니다. 김 군의 허망한 죽음은 국민들의 슬픔과 분노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요즘 ‘경제 민주화’란 화두가 유행처럼 정치권에서 남발하지만 실제로 실천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 제도와 사회 구조를 개선하는 것만이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양극화 해소와 불안과 분노를 건강하게 치유할 수 있는, 나눔과 배려, 화합과 상생의 사회적 분위기 조성도 절실합니다. 경쟁이 필요한 사회이지만, 공동선과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사회 공동체를 복원해야 합니다. 교사는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삶의 가치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하는 상생(相生)하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어야,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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