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에서 왕이었으나 폐위 되어 군(君)으로 불리우는 왕이 2명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끝내 복위되지 못해 왕의 조(祖)나 종(宗)이 아니라 군으로 불리어 졌다. 광해군은 무엇을 잘못했기에 왕으로 복위되지 못하고 비정의 폭군으로 기록되었을까? 14대 선조는 본처의 아들이 없었다. 선조는 후궁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 2명의 아들을 낳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나중에 계비 인목왕후가 후궁이 아닌 왕비로 적장자 영창대군을 낳게 되자 세자자리를 놓고 정치세력은 남인과 북인에서 다시 북인에서 대북 소북으로 나누어지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적장자 영창대군이냐 이미 세자로 책봉된 후궁의 둘째 아들 광해군이냐를 놓고 패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죽자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어린 영창대군을 물리치고 15대 왕이 되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뒷수습에 전력을 쏟았다. 없어진 토지대장과 호적을 다시 작성했다. 소실된 왕궁과 성곽을 복구하고 전쟁을 대비한 무기들을 만들었다. 허준을 시켜 『동의보감』을 짓게 하여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해결하려 노력했다. 또한 삼강행실도 화기도감 같은 많은 소실된 서책을 다시 복원 개간하였으니 그의 선정은 어느 왕보다 뛰어났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백성과 함께 같이 몸으로 싸웠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성을 사랑했고 백성을 위한 정치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것이 1608년 경기도에서 시작한 대동법 실시였다. 대동법이란 백성이 자기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을 특산품이 아니라 농토 결수에 따라 곡식으로 납부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왕이 된 남자 이병헌: 사월아, 열다섯이라 했느냐? 그래 어쩌다 예까지 흘러왔느냐? 궁녀 사월이: 특산물로 전복을 바치라하여... 왕의 남자: 농사꾼에게 특산물로 전복을 바치라 하다니- 사월이: 고리를 빌려 세금을 메우다보니 빚이 빚을 불러 결국 전답마저 빼앗기게 되고 아버지는 옥살이를 하고 어머니와 동생은 변방 노비로 팔리고 저는 참판댁 몸종으로... 왕 이병헌: 이런 나쁜 놈들! 사월이: 아버지는 매를 맞아 해를 넘기지 못하시고... 왕: 에이, 이런 ×같은 놈들, 내시: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왕은 서민들의 세금을 줄여주는 대동법 실시를 공표한다. 토지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이니 양반들도 세금을 내어야 했다. 기득권 대신들이 반대했다. 왕의 남자: 토지 열 마지기를 가진 사람에게 쌀 열 가마, 땅 한마지기 가진 사람에게 쌀 한 가마를 바치도록 하자는 게 차별이오? 도부장은 죄인을 대령하라. 저 자는 강원도 현감으로 양민들에게 높은 이자를 챙긴 관리요. 저 자의 주리를 틀어 저자가 받은 고리를 어떤 자에게 바쳤는지 얼마를 바쳤는지 그걸 받아 처먹은 놈은 또 누구에게 갖다 바쳤는지 내가 주리를 틀어 여기서 전모를 밝혀야 되겠소? 한편 명나라는 만주벌판에서 강성해지고 있는 여진족 후금과 싸우기 위하여 조선에게 파병을 요청하였다. 임진왜란 때 지원병을 보냈으니 이번에는 자기네를 도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은 지는 해였고 후금은 뜨는 해였다. 섣불리 지원병을 보냈다가는 오히려 후금의 보복으로 풍전등화가 될 판이었다. 대신들이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고 파병을 종용했다. 광해군은 강홍립 장군을 은밀히 불러 밀서를 주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당신의 나라(후금)와 싸울 의향이 전혀 없습니다. 명이 강압적으로 의리를 지켜라하기에 지원병을 보내지만 강홍립 장군은 곧 항복할 것입니다. 우리 군대들을 너그럽게 봐주시고 부디 돌려보내 주시면 후에 외교를 맺고 당신의 나라와 친교하겠습니다.” 이른 바 광해군의 중립외교였다. 명을 거스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후금과 싸울 수도 없었던 광해군은 앞날을 내다보며 지혜의 중립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하여 반발이 컸다. 광해군은 1613년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소북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축옥사를 빌미로 눈에 가시였던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 시켰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유·이귀·이괄·최명길 등 서인은 남인의 협조를 얻어 인조반정(1623년)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16대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 동인에게 밀렸던 서인이 남인과 더불어 정권을 잡았다.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이 처형되었고 200여 명이 유배되었다. 광해는 왕에서 군으로 강등되어 영영 회복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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