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조선건국 이후 놀랍게도 꼭 200년이 지난 1592년 일본노무시키들이 조선을 쳐들어왔다. 임진년에 일본 놈이 쳐들어 왔으니 임진년 왜놈이 일으킨 전란 임진왜란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風神秀吉)가 처음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했다. 통일은 억지로 됐지만 내부에서는 곳곳에서 불복종이 많았다. 쇼군 무사 막부를 잠재울 어떤 이슈가 필요했다. 꿈에도 그리던 대륙 진출이다. 섬에서만 살던 그들에게 꿈은 꿈에도 그려보는 거대한 땅덩어리 대륙을 한번 밟아보는 것이었다. 바다에 떠있는 것이 아닌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땅덩어리 대륙을 갖고 싶은 것이 그들의 평생소원이었다. 그래서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꿈에도 그리던 대륙을 차지해보고자 대륙진출에 올인을 한 것이었다. 한편 조선은 태평성대였다. 200년 가까이 전쟁이 없었다. 명나라와 친교하면서 훈구 대 사림으로 대대로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니 일본노무시키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관심거리도 아니고 그저 변방의 섬나라일 뿐이었다. 신라시대부터 대대로 섬나라 습성대로 조선의 해안가 마을을 기습적으로 쳐들어와 재물을 빼앗고 달아나는 패거리 해적이나 도적의 무리로만 생각하였다. 그런데 1592년 4월13일 16만 왜군이 전격적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600여척의 왜선에 무장을 하고 부산진포와 동래포 해안으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상주 충주를 거쳐 5월3일 단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내각은 너무나 놀라서 입만 벌리고 놀랄 뿐이었다. 제대로 된 싸움은 한번 밖에 없었다. 상주에서 이일 장군이 맞섰으나 상대가 안됐고 이어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8000명의 조선 군대를 가지고 방어선을 치고 기다려 왜군과 마침내 일전을 했다. 그러나 조총을 앞세운 16만 일본군에게 수적으로도 상대가 안 돼 파죽지세로 밀렸고 신립 장군은 강물에 몸을 던졌다. 고두심 역사스페셜 해설가: 당시 동래부절도사 송상헌이 싸우는 전투를 그림으로 그린 <동래부순절도>를 보십시오. 부녀자들이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깨서 싸우고 있습니다. 두 개의 깃발이 나부끼는데 하나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는 <가아도(假我途)> 다른 하나는 죽을 수는 있어도 절대 길을 빌려줄 수 없다는 <가도난(假途難)>이 쓰여 있습니다. 그랬다. 일본은 조선에게 중국 명나라를 치러 갈 테니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다. 이는 조선도 명나라도 다 잡아 먹겠다는 심보였다. 가장 무능한 왕으로 치부되는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황급히 평양으로 도망가고 평양에서 다시 압록강 의주로 도망갔다. 여차하면 중국 명나라로 가려했던 것이다. 온 나라 온 백성이 7년 임진왜란 전쟁으로 쑥밭이 되고 그야말로 함경도까지 초죽음 전쟁터가 되었지만 선조는 싸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갈 궁리만 했다. 관군이 있을 리 없었다. 있었다 해도 무기도 없고 훈련도 되지 않아 조총 앞에서 쓰러질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은 어떻게 임진왜란을 극복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의병의 활약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고향을 지키며 살던 민초 농민들, 부처님 염불 외우던 승려까지 나서서 너도나도 가릴 것 없이 나라를 위하여 몸을 던졌다. 익숙한 지리를 활용한 전술로 은폐와 엄폐, 각개전투와 기습공격 등 게릴라 유격전으로 일본군들을 치고 빠지며 하나씩 몰살시켜 나간 것이었다. 경상도 의령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 합천은 정인홍, 전라도 담양은 고경명, 나주는 김천일, 옥천은 조헌, 함경도는 정문부, 묘향산은 서산대사 휴정, 강원도는 사명대사 유정 등을 중심으로 의병과 승병들이 목숨을 초개같이 던졌다. 이들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치욕일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은 훗날 임진왜란의 악몽을 하루하루를 일기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징비록(懲毖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까지도 적어 놓았다.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5만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 조선군과 함께 평양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일본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승리를 이끈 3대첩이 있다. 서울 근교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이 2만의 왜놈과 싸워 이긴 ‘행주대첩’이다.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같이 싸웠다하여 ‘행주치마’라는 말이 나왔다. 두 번째 대첩은 진주에서 벌어진 ‘진주대첩’이다. 논개가 적장을 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들고 김시민 장군이 싸우다 안타깝게 전사했지만 왜놈을 물리쳤다. 세 번째 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이다. 잠깐의 휴전이 있었고 정유재란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도요토미 헤데요시가 죽자 일본은 철수하고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났다. 장기간 계속된 임진왜란의 피해는 컸다. 전 국토가 황폐화가 되고 기근과 질병으로 농민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불국사, 경복궁, 실록을 보관한 사고가 불탔다. 도자기 서적 활자 등 많은 문화재가 유출되고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의 침략 근성은 1875년 강화도로 침범한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고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 한일병합으로 일본에게 결국은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 가장 먼 나라인 일본노무시키들의 침략 근성인 야수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도 단 한 번의 사과도 하지 않고 뻔뻔한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들의 야만성에 대해 얼짱 역사 탐험대는 계속 낱낱이 밝혀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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