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는 하루 중 저녁산책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산책은 보통 저녁 먹고 배 만지며 구시락재를 넘어 엄천강변을 따라 걷고 나서 다시 집으로 치고 올라오게 되는데. 약 40분 정도 걸려 체력적인 부담도 없다. 여름에는 땀이 제법 나지만 봄가을에는 더없이 쾌적하다. 특히 꽃이 많이 필 때는 눈도 즐겁지만 향기가 있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같은 길을 십년 이상 반복해서 걷다보니 나는 꽃향기도 물길처럼 흐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월이면 구시락재 넘어가는 깔딱 고갯길에 아카시아향이 강물처럼 쏟아지고, 고개를 넘어서면 찔레향이 계곡물처럼 졸졸 흐른다. 유월에는 엄천강변에 칡꽃향이 범람하고, 보이지 않는 숲에 숨어서 돌돌돌 흐르는 돌복숭아 향은 걸음을 멈추게 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돌복숭아를 찾아 향기의 시원이라고 짐작되는 숲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향기에 취해서 잠시 걸음을 멈춰 서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전혀 급할 거 없는 저녁 산책길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오랫동안 향기 넘치는 길을 반복해서 걷다보니 나의 뇌 속에는 산책길의 향기지도가 나도 모르게 저장이 되었다. 오월 말경에는 어드메쯤 찔레향이 흐르고 유월 언제 어디서 칡꽃향이 범람하는지 나의 뇌에는 즐겨찾기로 저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2.산책길은 개와 함께하면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지금 키우고 있는 셔틀랜드 쉽독 사랑이는 양을 치던 본능이 있어 아내와 나랑 같이 느긋하게 산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의 양을 몰듯이 산책을 한다. 집을 나서자마자 이 녀석은 아내와 내 주위를 빙빙 돌고 오도 방정을 떨며 따라 오다가, 한 번씩 길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아내와 내가 멀어질 때까지 지켜본다. 길 한가운데 동상처럼 붙어 있는 이 녀석은 거리가 웬만큼 멀어졌다 싶으면 벌떡 일어나서 전력 질주하여 아내와 나를 따라잡고는 다시 주위를 빙빙 돌며 양몰이 연습을 하고 온갖 방정을 떠는데, 나는 첨엔 이해를 못해 개가 너무 산만하다고 혼을 내곤 했다.지금은 없는 코커 스파니엘 코시와 산책할 때는 내가 사냥총이라도 한 자루 들었으면 딱 어울릴 법했을 것이다. 코카 스파니엘의 사냥개 본능은 나의 느긋한 산책길을 수렵길로 바꿔버렸다. 코시는 절대로 주인과 같이 걷는 법이 없고 항상 코를 땅에 박고 앞장서서 걸었다. 그리고 주인이 걷는 산책길로 앞서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옆으로 새어 산으로 올라가고 계곡으로 내려가서 짐승을 수색하다가, 주인이 안 보인다 싶으면 허겁지겁 쫓아와서 또 다시 본능에 충실했다. 하지만 내가 키웠던 개들 중에는 주인의 산책길에 품위를 더해주며 차분하게 걸음을 같이한 녀석도 있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모두 무지개다리를 건너가고 셔틀랜드 쉽독 사랑이만 내 곁에 있지만, 모두들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대로 든 내 인생 산책길의 좋은 반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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