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속 문학의 설화 가운데 교훈담으로 급한 일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주제를 다룬 것이 있다.
돈으로 친구를 사귀는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가 과연 아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는지 시험하고자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은 돼지를 쌀자루에 넣은 다음,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하라고 했다. 아들이 친구들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이 사람을 죽였는데 시체를 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반면, 아버지가 자신의 친구를 찾아가 살인을 해서 시체를 지고 왔다고 하니, 그 친구는 바로 집으로 들어오게 한 후 수습할 방도를 찾자고 했다. 그리고 자기 집 뒤꼍을 괭이로 파고 시체를 묻고는 친구에게 안심하고 자라고 했다. 이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인지를 가르칠 수 있었다.라는 내용이다.
설화 속 아버지는 친구가 같은 일을 부탁해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친구(親舊: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이기에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럼 우리는 그런 친구가 있는가?
상대방이 친구라고 하는데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또 무례하다고 느껴진다면 그는 친구일까.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몇 명 혹은 한명도 없는 것 같다. 왜일까? 우리 사는 세상에 왜 진정한 친구가 흔하지 않을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다. 즉 내 자신이 먼저 친구를 위해서,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진정한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친구가 없는 것은 자기희생을 싫어하고 자기유익만을 추구하는 자신 때문에 자신도 진정한 친구가 못되고, 타인도 나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걸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친구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 혹시 ‘그렇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누구나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부터 진정한 친구가 돼주지도 못하므로 그런 친구를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대충 친구를 찾고 그것이 진정한 친구라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간다. 혹은 동물이나, 식물, 자연을 벗하며 외로움을 달래며 살아간다.
그런 잘못된 친구관계가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더 힘들고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친구라면 서로에게 욕할 수 없다. 친구라면 최대한의 존중이 우선 되어야 한다. 친구라면 잘못되어가는 것을 보면 쓴 소리를 하거나 들을 수 있어야한다. 친구라면 서로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 자신이 먼저 짐을 져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친구는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낸 것도 아니면서, 만나서 의미 없는 대화하고, 같이 놀고, 같이 먹고, 격이 없는 짖을 하며 어울리며 서로 불평불만을 이야기하고 들어주고, 대책 없는 말만 늘어놓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서로의 잘못을 덮어주기에만 급급한 불완전한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에게 사랑이 있어야 먼저 좋은 친구가 돼 줄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 인류를 친구 삼으려고 먼저 목숨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내가 먼저 진정한 친구가 되어 진정한 친구가 많은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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