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 대 사림이 싸우는 통합 빅매치 이중격투기는 4번의 격투를 벌인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이다. 공신이며 권력의 기득권을 잡고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훈구파는 신진 사림의 공격을 네번 다 격파하여 네번 다 승리하였다. 사림은 네번 붙었으나 네번 다 일방적으로 깨져 죽거나 귀향을 가거나 부관참시를 당하거나 몰락하였다.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림 씨가 남지 않았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사림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후학들을 가르치며 호시탐탐 재기를 노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4번 싸워 4번 다 이긴 훈구파는 결국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4번 싸워 4번 다 진 사림파가 결국은 정권을 잡고 조선을 이끌고 나가는 결과가 나왔으니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하면 신예같이 나타난 신하 조광조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실천자로서 중종에게 철인 군주를 강조하고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향약(마을자치규례)을 보급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각하, 각하를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대신들에게 1계급 특진과 많은 토지를 상으로 내려주셨잖아요. 그런데 제가 조사해보니 뻥이 너무 많았어요. 117명이 상을 받았는데 이중 76명이 다 뻥이었어요.” “뭬라고? 공적을 위조해 사기쳤단 말이냐. 위훈삭제(상장명부를 지우고)토록 하고 토지와 재산을 전부 몰수하여라!” “각하, 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두 번의 사화로 똑똑한 젊은 관리들이 다 죽거나 귀양 갔습니다. 나랏일을 볼 인재들 씨가 말랐습니다. 각하, 3년마다 실시되는 과거시험으로 인재를 뽑아 쓰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각하, 현량과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여야 나랏일이 잘 돌아갈 것 같습니다.” “현량과가 무엇이냐” “성품,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7가지 항목을 종합하여 각 지방에서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고 그들을 궁궐 뜰에 모아 각하가 직접 시험을 보고 면접해서 관리로 선발하여 나랏일을 맡기십시오. 과거시험보다 현량과 추천이 빠르고 믿을 만 한 사람이 추천 보증하기 때문에 유능사원 선발은 이게 최고입니다. 각하.” “옳구나. 그렇게 하라.” 조광조의 급진 개혁정치는 주위 훈구파들의 표적이 되었다. 훈구파들은 자리를 뺏기고 현량과 천거로 사림파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니 어찌 손해만 보고 있겠는가? 훈구파 대신이 말했다. “주상전하, 기묘한 이야기가 들립니다. ‘주초’라는 사람이 곧 왕이 된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서 자자하게 들립니다.” “내 대신 누가 왕이 된다고? 주초가 누구냐?” “이것 보세요. 벌레들도 낙엽을 파먹었는데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를 파먹고 있어요. 주초(走肖)를 합치면 조(趙)자가 돼요. 그러니까 조씨가 왕이 된다 그거지요.” “그렇다면 조광조가 내 대신 왕이 된다 이 말이냐? 여봐라. 조광조를 당장 삭탈관직하고 귀양 보냈다가 죽여버려라!” 훈구파에 의해 다시 사림파 대신들이 죽어나갔다. 이것이 기묘한 이야기 기묘사화이다. 마지막 4번째 일어난 을사사화는 너무나 복잡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 외척인 소윤(小尹)이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요약해 보면 대윤파의 제1계비 장경왕후가 세자 호를 낳아 인종이 왕이 되자 대신 김안로 남동생 윤임 등이 득세하여 초반전 실권을 잡고 소윤파를 괴롭혔다. 그러나 인종이 8개월 만에 죽고 소윤파 제2계비 문정왕후의 세자 경원대군이 12세에 명종이 되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자연적으로 외척 남동생 윤원형 일파가 득세하여 후반전 실권을 잡고 대윤파 사림들을 역모죄로 몰아 100여명을 대거 숙청하여 죽이고 귀향 보내고 대대적 보복을 하였다. 이처럼 무.갑.기.을 4대사화는 훈구가 사림을 공격하여 실권을 잡았지만 끈질기게 덤벼드는 사림의 후계자들을 막지는 못했다. 훈구 대신들은 하나 둘씩 늙어 운명을 달리했다. 권력을 이어받을 제자들이나 세력이 없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재무장하여 정계에 진출하는 신진 사림들은 계속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학파를 형성하고 지연 학연 혈연을 내세워 진출했다. 때문에 사화에서는 전멸했지만 끝내는 정치권력이 서서히 사림 쪽으로 기울어져 15대 선조 때부터는 사림이 최종 승자로 돌아가 사림이 정권을 잡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림의 승리를 가져다 준 배경에는 지방의 서원이 큰 한 몫을 했음에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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