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안쪽까지 버스가 다니지 않는 백전면 상백현마을. 마을 대부분이 70대 이상 고령자인 이 마을 어르신들이 읍내에 한번 나가려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까지 20여분을 걸어야 하고, 자칫 버스라도 놓칠 경우는 꼬박 다음 버스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같이 교통이 불편한 상백현마을 어르신들의 발이 되어주는 김종환(67)씨가 있어 어르신들은 불편하지가 않다. 마을 어르신들이 읍내나 면사무소를 다닐 때 그가 운전하는 트럭을 이용한다. 그는 “별일도 아닌데… 그냥 있으니 뭐해서 어르신들과 함께 다니는 것뿐이다”라고 멋쩍어했다. 읍내에 집이 있는 김종환씨는 오전 8시면 그의 농원에 출근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농원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다가도 어르신들이 출타할 일이 있으면 차량을 대기시킨다. 그는 “하루에도 3~4번씩 어르신들이 읍내에 볼일이 있다고 하시면 언제든지 모시고 다닌다”라고 말했다. 마을회관 앞에는 그가 어르신들을 모시고 다니는 차량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 그는 “버스가 다니는 큰 길까지 20분 이상을 걸어서 나가야 한다.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 부터인가 어르신들을 모시고 다니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을 어르신들의 발이 되는 것은 물론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한 시장 봐주기, 세금내주기, 현금 입출금 등 궂은일을 도맡는다. 그는 “기름값 그런 것 따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냥 놀기 삼아 어르신들과 함께 다니는 것이다. 별것 아니지 않나”라며 “함양에 있어 봤자 할 일도 없고 친구들과 술이나 먹지 않나”라며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예전 70년대에 읍내에서 전파사를 시작으로 아이 옷가게를 운영했던 김종환씨. 고향인 상백현 마을 앞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밭 8000여평 ‘백현농원’에 단감나무를 심고 가꿔온 것이 40년이 지났다. 그는 “모두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어르신들이고 집안 어르신도 계신다. 어르신들이 예전에는 그냥 이름을 막 불렀는데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손자이름을 앞에 붙여준다. 그러니까 다들 그냥 편하게 가자고 하고, 딱히 이렇다 할 일도 없으니 함께 가는 것이다”라고 마을 어르신들과의 우애를 자랑했다.
현재 상백현마을 부녀회 총무를 맡고 있는 김종환씨. 마을회관에서 식사하시는 어르신들을 위해 읍에서 찬거리를 사서 나르고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매일 오전 8시에 마을에 출근 도장을 찍고 농원에서 일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의 말벗이 되어 드리며 함께 즐긴다. 그리고 오후 5시에는 읍내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출퇴근 식으로 고향 마을로 출근한다. 마을에 대소사가 있으면 챙기고, 그냥 노는 것이다. 젊었을 적에는 진주고 멀리까지 모시다 드리고 가면서 식사도 대접해 드리고 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멀리를 가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상백현마을은 ‘금연마을’로 유명하다. 마을을 둘러봐도 담배꽁초 하나 볼 수 없는 곳이다. 그는 “만약 들어오는 사람이 담배를 피면 이사를 나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 마을회관에서는 어르신들이 흔히 즐기는 화투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상백현마을 어르신들은 화투 대신에 윷놀이를 즐긴다고 자랑했다.
읍내에서 상백현마을까지 매일 오가고 있지만 원래는 고향에 집을 짓고 들어오려 했는데 집안 사정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그는 “돈이야 먹고 쓸 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돈이 많으면 싸움 밖에 더 나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는 끝으로 “상백현마을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다.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과도 너무 많은 정이 들었다. 어르신들 한분 두 분 떠나시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고 안타까워하며 고향의 정을 이야기했다.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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