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아픔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가급적 그러한 것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행복과 평안이 언제나 나와 가족들과 공동체에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고난과 행복은 반대말 같은데 사실 언제나 붙어 다니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고난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고 있다 해도 무의미한 것이다. 마치 몸이 아파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땀 흘린 노동이 있어야 휴식의 꿀맛을 알며 배고파 봐야 음식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이 고생을 해봐야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잘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힘과 인내를 배우고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이 땅에서 가자 위대한 말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말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고 다시 살아난 부활의 아침에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앞에서 “마리아야!”라고 말한 예수님의 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하게 죽으신 그 분은 모든 인간의 고통을 한 몸에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고난의 종의 모습이었다. 갖은 조롱과 매질과 심한 모욕감을 받으시며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어간 그 분.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던 로마 장교가 하는 말은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삼일 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부활의 아침 고난을 통과하신 예수가 마리아를 향하여 한 말은 정말 인류역사 가운데 길이 남을 멘트 (대사) 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대한 멘트를 한 인물이 구약에도 나온다. 바로 요셉이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 했고 결국 노예를 팔아버려 20년을 고생하게 만든 형들 앞에서 “내가 요셉입니다!” 라고 죽은 자가 살아나듯 자신을 밝힌 내용은 감동 그 자체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을 그것도 애굽의 총리로서 왕과 버금가는 권력자가 되어 있는 그래서 그 말 한마디면 자신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높은 자리에 있는 동생 요셉이 자신의 밝힌 말을 들었을 때 형들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심장이 멎은 것 같은 상태로 멍하니 쳐다보았을 것이다. 진정 요셉의 영광은 고난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섭리이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듯이 영광과 행복은 고난이라는 것으로 지으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과 요셉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그 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 제자 베드로도 실패를 통해 자신의 무능력과 예수를 모르고 저주한 자신의 배반의 고통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고 그는 그 분 앞에서 다시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고난은 우리가 피하고 싶고 겪어보고 싶지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숙과 성장과 행복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고 또 사회가 성숙하지 않다고 한다면 우린 고난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고 겪어보지 않았고 오히려 편안하고 안락한 것만 꿈꾸고 구하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라는 민족적 대학살을 경험하면서 국가의 소중함을 배워 이스라엘 건국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대학살을 경험했기에 우리는 그 피로 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고” “현재의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써 내가 주의 율례와 법도를 배웠노라!” 라는 말처럼 고난이 올 때 그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돌파하면 좋을 것이다. 불순물 없는 완전하고 순전한 금은 뜨거운 풀무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절대 고난의 사람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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