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짱 기자 : 먼저 시간에 이어 두 번째 ‘왕과의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의 시대를 어떤 사람들은 조선의 전성기라 부르고 영·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를 본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세종대왕 : 내가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용비어천가 2장에 다 있어요.(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꽃 좋고 열매가 튼실하게 많이 열린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므로, 내(川)를 이루어 바다로 간다.) 이 모든 근본에는 백성이 있지요. 민본사상. 백성의 마음을 읽고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과 함께 할 때 백성들은 왕을 따르고 춤을 추지요. 그게 태평성대지요. 그리고 얼짱기자 양반. 나라가 융성해지는 나만의 비법 하나 가르쳐 드리리다. 아버님 태종은 수직행정체제인 ‘6조직계제’로 나라를 엄히 다스렸어요. 하지만 나는 수평적 행정체제인 ‘의정부서사제’로 나라를 다스렸어요. 얼짱 기자 : ‘의정부서사제’가 뭐에요? 의정부는 부대찌개가 유명한데요. 세종대왕 : 의정부서사제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정승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여론을 듣고 민주적 토론을 거쳐 나라를 이끌어가는 재상중심정치지요. 나는 의정부에 보고를 받고 의정부에 나의 의견만 이야기 하면 그 재상들은 또 관계부처 실무자들과 의논하여 일을 처리해요. 그러니 무슨 독재가 있겠어요. 예로부터 전성기의 왕들은 왕권과 신권이 잘 조화 된 유교정치를 했어요. 이것을 ‘택현의 논리’라고 하는데 총명하고 자질이 우수한 세자를 후계자로 지명하듯 인재를 잘 뽑아야 나라가 잘되는 것이에요. 그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하여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재를 기르는 곳이 집현전이지요. 백성들을 깊이 헤아리고 춤추게 하는 것이 왕이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이지요. 나는 항상 백성에게 길을 물어요. 얼짱 기자 : 인재등용을 폭넓게 하신 소통의 제왕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세종 때부터 단종 때까지 집현전학파라 부르는 대신들이 100여명에 이르지요. 성삼문,신숙주,강희안,정인지,맹사성,박연,박팽년,이개,최만리,최항,황희... 세종대왕 : 설마 100명을 다 말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요? 얼짱 기자 : 대왕님께서는 아주 재미난 정책을 시행하셨어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인데 젊고 실력이 있는 자를 골라 관청의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휴가를 주어 집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하셨어요. 말하자면 유급 휴가제를 실시하신 거지요. 대단하십니다. 또 최초의 여론조사를 실시하셨어요. 토지 조세개혁을 위해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을 만들고 17만명에게 찬반을 물어 9만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는 기록이 있어요. 민본주의의 초석이 아닐 수 없군요.그렇지만 일부 북쪽 국경지대와 남부 해안가에서는 호시탐탐 오랑캐나 왜적들이 나타나 마을을 약탈해 가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왕께서는 최근 최신 이지스함 세종대왕함을 동해와 남해에 배치하셨다는 소식이 있어요? 왜 그리 하신 겁니까? 연합해상작전을 해야 했습니까? 세종대왕 : 그래요. 북쪽 여진족들이 자꾸 우리 영토를 넘본다는 보고가 있어 최윤덕 장군을 압록강 지역에 급파했어요. 그쪽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여 관리하라고 했지요. 또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 장군에게는 두만강 지역을 정벌하라고 출정시켰어요. 그 쪽에 있는 여진족을 두만강 밖으로 쫓아내고 6진을 두어 관리하라고 했어요. 4군6진의 설치지요. 이로써 우리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지금의 호랑이 모습을 한 영토를 확고히 하게 되었어요. 얼짱 기자 : 일본에게 삼포로 가는 길, 삼포개항을 허락하셨다는 말이 들려요. 삼포개항은 어찌된 일인가요? 세종대왕 : 남쪽 해안엔 왜구가 자꾸 해안가 마을을 침범해 살인과 도둑질을 일삼았어요. 그래서 아까 말한대로 세종대왕함을 급파하고 이종무 장군을 시켜 본거지인 대마도를 아예 정벌하고 오라고 명령했어요. 대마도주에게 항복을 받고 돌아왔는데 대마도주가 먹고 살게 제발 조선과 교역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여 부산포(동래), 제포(진해), 염포(울산) 삼포를 열어 주고 대신에 다시는 조선을 침범하지 않도록 했지요. 얼짱 기자 : 끝으로 시중에서 지금 왈가왈부 말이 많은 고액의 호랑이 모피 외투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진상을 밝혀주시지요. 뭐, 수천만원대 가는 모피 외투를 신숙주에게 늦은 밤에 몰래 하사하셨다구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세종대왕 : 하하하. 기자 양반. 백성들에게 오해를 일으켜서 미안하다고 써주세요. 실은 아주 추운 늦은 자정이 넘은 겨울밤이었어요. 잠을 깨어 잠깐 밖을 나왔는데 집현전 숙직실에 등불이 켜 있는 거예요. 늦은 밤까지 불이 켜 있어 이상해서 가만히 들어가 보았지요. 집현전을 들어가 보니 신숙주가 책을 읽다 침을 흘리고 깜박 잠들어 자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 늦은 밤까지 추운데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있었다니 내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나 내가 입고 있던 초구(초구, 수달의 가죽으로 만든 두루마기)를 벗어 신숙주의 몸에 덮어 주고 나왔어요. 하하하, 그게 그리 크게 잘못된 일이오? 기자 양반? 아침에 눈을 뜬 신숙주는 임금의 용포 두루마기가 자기 몸에 덮여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뜨거운 눈물을 펑펑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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