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날씨를 무척 좋아합니다. 봄 날씨는 산뜻하고 상큼한 느낌 그리고 약간 춥기는 하지만 따듯한 어머니의 품인 것 같습니다. 왠지 봄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색의 조화된 꽃들을 떠올립니다. 봄이 사랑의 계절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아홉 번째 한국의 봄을 겪고 했는데 올해 봄의 생명력을 받을 수 없고 기운도 없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일정한 그런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두 아이를 생각해서 기운을 내야하며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기 위해 항상 노력합니다. 그땐 책을 많이 읽다 보니 긍정적인 생각을 갖다 줄 수 있습니다. 다문화가정에 맞는 책들이 너무나 많고 그중에 같은 고향 한 베트남친구의 글을 읽고 나서 공감이 있으면서 힘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같은 처지여서 쉽게 공감하고 그래서 그 친구의 글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서 올렸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은 겨울이라 눈도 많이 내리고 무척 추웠습니다. 공항엔 남편과 아는 언니 분이 마중을 나왔고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저는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정도였습니다. 시댁은 강원도 화천으로, 가는데 4시간이 걸렸고 한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저는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지 몰라 무서웠습니다. 시댁에는 일주일 동안 있었고 그동안 아무 것도 시키지 않아 쉴 수 있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시동생부부와 함께 살았고 제 동서는 러시아 사람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온 동서는 일 년밖에 안됐지만 한국말을 잘해 시댁 식구들과 대화도 잘하고 시댁 식구들에게 사랑 받는 것을 보며 저도 동서처럼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시어머님과의 언어소통은 원활하지 않고, 농사는 무척 바쁘고 시어머님은 저에게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시키며 빨리하지 않으면 화를 내셔서 무척 슬펐습니다. 매일 저는 시어머님과 농사를 위해 함께 나갔고 한국어를 배울 시간은 농사 이후인 저녁시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녁시간에 하는 집안일과 하루 종일 한 농사일로 몸이 피곤해 한국어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농사일을 하지 않는 동서를 질투했습니다. 같은 외국인 며느리인데 왜 나만 농사일을 다하고 동서는 안 해도 되는지, 농사일을 하지 않는 동서는 한국어 공부하는 시간도 더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제 옆엔 남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행동을 보면 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 덕분에 저는 기운이 나서 계속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2개월 후 베트남에 대한 그리움이 줄어 들 때쯤 베트남에 있는 새 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족이 죽고 가보지 못해 너무 슬펐습니다. 시댁식구들은 왜 울었냐며 물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힐지, 내 맘을 전해야 하는지 슬픈 맘을 통할사람이 없어 슬펐습니다. 제가 임신했을 때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을 만났는데, 의사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에 한국이 아닌 베트남에 가서 살고 싶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곳에 이주민 관련 지원단체가 있었는데 저는 그곳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님은 허락해 주지 않지만 남편은 센터에 저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뿐이지만 센터에 가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곳에서 모든 슬픔을 잊고 한국에 대한 것도 많이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년 후 예쁜 딸이 태어나고 남편은 아들이나 딸이나 다 좋다고 말했지만 시어머님은 딸을 싫어하셨습니다. 애기를 낳은 후에도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고생스러웠지만 사랑하는 남편과 예쁜 딸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이듬해 베트남에 계신 친정엄마의 부고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번엔 한국말을 할 수 있어 남편과 시댁식구들에게 부고를 전할 수 있었지만, 시부모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간병할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시댁 식구들은 먼 곳에 살고, 동서는 러시아에 가있어 베트남에 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친정엄마의 사진을 붙잡고 울기만 했습니다. 저는 더욱더 열심히 한국어에 매진했고 한국어 선생님과 남편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뒤 둘째를 임신했고, 시어머님은 한국 요리도 가르쳐 주시며 잘 해주셨기에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 무척 행복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2년 밖에 안됐지만 시부모님 생신, 암평, 아기 생일에 맞춰 미역국과 한국음식을 한만큼 잘하게 되었고, 요리를 통해 한국의 생일문화, 명절 차례의 기원도 알게 되었습니다. 남신 기간 동안에도 시부모님과 농사하러 나갔고 9개월 후 아들을 낳았습니다. 딸이 태어났을 때 좋아하지 않았던 시부모님은 좋아하시며 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장남의 며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힘든 일도 있었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시어머님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병원과 집의 거리가 멀어 제가 병원에 시어머님 간병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가끔 방문하였고 동서는 아예 오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님이 퇴원하던 날, 두 명의 자녀를 두고 동서가 가출했습니다.
큰엄마인 저는 제 아이 두 명과 조카 두 명까지 네 명의 아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가출한 동서는 이후 집에 들어왔고 동서를 무척 사랑한 시동생은 다시 행복하게 살겠다며 동서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동서는 다시 가출했고, 2009년 말두 명의 자녀를 두고 시동생과 이혼을 했습니다. 시동생은 두 명의 자녀와 저희 집에 들어와 살게 됐습니다. 저는 혼자서 집안일과 농사일을 하며 네 명의 아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밤엔 동서 자녀들이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었고,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던 저는 제 자식처럼 생각하고 잘 키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 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제 아들과 시동생 자녀들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많이 고생했지만 아이들 모두 건강히 잘 커줘서 제 맘이 편합니다. 한국어를 잘하게 된 2008년 9월, 전 대한민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베트남인 7명이 베트남 며느리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돕고 있습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슬픈 일도 지나가고 지금 저는 무척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공감하면서 배워야 할 점은 많습니다. 그리고 힘들 날을 극복하고 항상 노력한 마음이 있어야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겨울이 지내가고 봄의 다양한 색상과 종류 꽃들과 나무의 새싹이 돋는 것처럼 희망을 기르고 행복을 찾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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